트러스 전 영국 총리, 채권시장 압박에 실각
다카이치 일본 총리, 심지어 트럼프도 눈치본다
덴마크, 그린란드 사태에 미 국채 매도로 대응
[블록미디어 이정화 기자] “나를 견제하는 것은 나 자신 뿐이다”
국제법과 의회도 겁내지 않는 트럼프 대통령이 뉴욕타임스와 기자회견에서 한 말이다. 그러나 트럼프가 신경 쓰는 존재가 있다. 바로 국채시장이다.
정치 권력자들은 언제나 유권자의 눈치를 보지만,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대상은 따로 있다. 시장의 준엄한 금융 치료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의 참모였던 제임스 카빌은 “환생한다면 채권 시장으로 태어나고 싶다. 채권 시장은 누구든 위협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린란드 사태와 다보스 포럼 이후 전개된 글로벌 경제 상황은 이 말이 단순한 비유가 아님을 증명했다고 23일자 블룸버그 칼럼이 지적했다.
정치인들은 채권 시장이라는 거대한 힘 앞에서 무리한 정책을 수정하거나, 때로는 권좌에서 물러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정부 지출 계획을 감시하는 엄격한 은행 지점장
채권 시장은 정부의 재정 운용에 대해 ‘은행 지점장’과 같은 역할을 수행한다. 정부가 감당할 수 없는 지출 계획을 세울 때 자금줄을 죄는 방식으로 견제력을 행사했다. 중앙은행이 단기 금리를 조절할 수는 있지만, 주택담보대출과 같은 실질적인 자금 조달 비용을 결정하는 장기 금리는 결국 부채 투자자, 즉 채권 시장이 결정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최근 16개월 동안 미국 연방준비제도(Fed)가 금리를 일곱 차례나 인하했음에도 불구하고 모기지 금리가 전혀 움직이지 않은 현상은 채권 시장이 가진 위협적인 힘을 보여주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2020년 코로나 팬데믹을 거치면서 각국 정부는 부실 채권을 떠안거나, 돈을 풀어야만 했다. 국가 부채 비중이 급상승했다. 채권 시장은 경제 회복의 한계를 결정할 권한을 갖게 됐다.
무리한 정책에 대한 심판, ‘채권 자경단’의 경고
채권 시장의 투자자들은 재정 건전성을 해치는 포퓰리즘적 정책이나 무리한 감세안에 대해 금리 급등(채권 가격 폭락)으로 응징하는 이른바 ‘채권 자경단(Bond Vigilantes)’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과거 유로존 위기 당시 이탈리아의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총리를 비롯한 여러 유럽 지도자들이 국채 수익률 급등으로 인해 권력을 잃은 사례가 대표적이다.
비교적 최근인 2022년, 영국의 리즈 트러스 총리 또한 채권 시장의 반란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트러스 총리는 인플레이션이 상승하는 상황에서 재원 대책 없는 감세안을 발표했다가 국채 금리가 폭등하자 취임 6주 만에 사임해야 했다.
당시 시장의 반응은 연금 펀드들의 파생상품 투자 실패와 맞물려 증폭된 측면이 있지만, 결과적으로 시장이 잘못된 정책에 대해 즉각적이고 치명적인 경고를 보낸 셈이었다.
이러한 ‘시장 심판’의 위협은 현재진행형이다. 일본의 사나에 다카이치 총리 역시 소비세 폐지와 같은 재원 없는 감세안을 거론했다가 국채 수익률이 급등하는 등 시장의 거센 저항에 직면했다.
다카이치 총리의 발언 직후 일본 30년 만기 국채 수익률이 급등했다가 진정되었으나, 이는 시장이 정치 지도자의 행동 반경을 제약하는 강력한 구속력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시사했다.
새로운 지정학적 무기가 된 국채
채권 시장은 단순히 개별 국가의 정책을 견제하는 것을 넘어, 국제 정치의 판도를 뒤흔드는 무기로서의 잠재력도 드러냈다. 과거 중국이 보유한 막대한 미국 국채가 무기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으나, 이는 중국 자신에게도 자해 행위가 될 수 있어 실현되지 않았다. 그러나 최근 유럽과 미국 사이의 묘한 긴장 관계는 상황이 다를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도이체방크의 조지 사라벨로스는 미국이 대규모 대외 적자를 통해 다른 나라가 청구서를 대신 갚아주는 구조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며, 유럽이 미국의 최대 채권자로서 약 8조달러 규모의 미국 자산을 보유하고 있음을 상기시켰다.
유럽이 미국의 국채를 대량 매도하지 않더라도, 단순히 매수 규모를 줄이거나 유럽 자체의 방위비 분담 및 EU 공동 채권 발행을 위해 자금을 회수하는 것만으로도 미국 경제에 타격을 줄 수 있다는 논리였다.
그린란드 사태를 맞아 덴마크의 연기금 한 곳이 1억달러 규모의 미국 국채를 매각한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트럼프는 그린란드 무력 침공 가능성에서 한발 물러섰다. 덴마크가 타코(Trump Always Chickens Out·트럼프는 늘 도망친다의 약자)에 국채 핫소스를 뿌렸다는 말이 나온다.
스콧 베센트 미국 재무장관은 다보스에서 ‘채권 무기화’ 가능성을 “관련 없는 이야기”라고 일축하며 민감하게 반응했으나, 이는 역설적으로 미국 정부가 채권 시장의 이탈 가능성을 얼마나 두려워하는지를 보여주었다.
의도하지 않아도 작동하는 거대한 견제 장치
결국 채권 시장이 정치 권력을 견제하는 방식은 특정 세력의 조직적인 음모라기보다는 시장 참여자들의 집단적인 위험 회피 본능에 가깝다.
그 효과는 실로 막강하다. 글로벌 동맹 관계의 지각 변동으로 인해 미국 자산에서 자금이 꾸준히 이탈하기만 해도, 이는 정치인들에게 카빌이 언급했던 것과 같은 위협적인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오늘날의 채권 시장은 그 규모가 너무나 거대하여 누구도 인위적으로 조작할 수는 없지만, 정치 권력이 경제적 합리성을 무시하고 독주하려 할 때 언제든지 그들을 멈춰 세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로서 기능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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