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5년 연희동에서 문 연 사러가쇼핑
쌀, 물, 누룩으로만 빚은 막걸리 출시
계절마다 독특함으로 동네 서정 담아내
[블록미디어 권은중 기자] 나는 신혼을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에서 시작했다. 아내가 어렸을 때부터 연희동에서 살았던 덕이다. 아내 집은 연세대 북문 쪽, 가수 서태지가 한 때 살았던 골목 끝집이었다. 그래서 연희동은 골목골목 나에게 꽤 친근했다.
아내와 연애할 때부터 자주 갔던 중국원, 월선옥. 라비앙로즈 같은 집들은 추억 속으로 사라졌다. 반면 30년 전쯤인 그때나 지금이나 자리를 잡고 있는 연희동칼국수, 연희김밥 같은 곳도 있다. 1975년 연희동에 문을 연 대형 슈퍼마켓인 사러가 역시 여전하다. 사러가는 그때나 지금이나 연희동의 중심이다.
내가 신혼 때 사러가에서 가장 많이 구매했던 것이 미국 맥주였다. 지금은 수입맥주가 흔하지만 그 당시에는 수입맥주가 귀했다. 그때에도 코로나, 쿠어스, 밀러같은 맥주를 사러가에서는 팔고 있었다. 또 사러가 안에 있던 경양식집 라비앙로즈는 베이컨에 감싼 안심 스테이크를 팔았다. 패밀리 레스토랑이 들어오기 훨씬 이전이었던 때였다. 난생 처음 접하는 서양 맛의 향연이었다. 수프, 샐러드, 빵와 함께 세트 메뉴였는데 가격이 2만원 정도였던 것 같다. 사립대학교 한 학기 등록금이 60만원이던 시절이니까 꽤 고가의 음식이었다. 크리스마스나 생일 때나 먹던 별식이었다.

내가 연희동에 마음을 둔 까닭
그렇지만 곧 연희동을 떠나 시내의 마포 강동 송파 등지로 이사를 다녔다. 나이가 들수록 회사에 다니기 편한 지하철역이 있는 곳으로 이사를 갔다. 연희동은 교통이 불편하다. 결혼 뒤에만 10번 이상 이사를 다녔지만 마음의 끈은 연희동을 놓지 않았다. 지금은 연희동이 홍대 상권이 확장하면서 연남동과 함께 핫플레이스로 변신했다. 갈 때마다 사람과 차들이 어찌나 많은지. 조용한 주택가가 젊은 남녀가 가득한 유원지처럼 변했다. 월선옥에서 추어탕을 즐겨 먹던 한때 동네 사람으로 격세지감을 느낀다.
나는 요즘에도 연희동을 자주 다닌다. 내가 이곳을 자주 가는 이유는 옛추억 때문만은 아니다. 국내 친환경 농산물을 판매하는 팜앤라이프 덕분이다. 나는 이 회사의 한혜령 대표와 친분이 있다. 한 대표는 우리 농산물은 물론 장, 김치와 같은 우리 전통 발효식품 예찬론자다. 얼마 전까지 마포에서 한식당을 운영할 정도로 요리솜씨도 빼어나다.
부모님 고향이 황해도인 한 대표는 유서 깊은 지역 음식을 많이 알고 있다. 그 중의 하나가 호박김치다. 황해도에서는 김치에 늙은 호박을 넣어서 찌개용 김치를 따로 담근 것이다. 설탕이 없던 시절 신김치를 맛나게 먹으려는 지혜에서 만들어진 레시피다.
한 대표는 지난해 연말 김장을 할 때 호박김치를 담궈 나에게 돼지고기 김치찌개를 끓여주시겠다고 약속했는데 1월 중순 일요일이 마침 호박김치찌개를 먹는 날이었다. 한 대표와 나는 전통주 연구 모임을 같이 꾸리고 있는데 그 멤버들과 호박 김치 찌개를 먹기로 했다.
황해도식 호박김치찌개에 어울리는 술은?
이날 모임의 술 조달은 내가 맡았다. 김치찌개에는 스페인의 템프라니요나 독일의 리슬링 혹은 유럽의 로제 스파클링이 잘 어울린다. 하지만 우리 모임이 전통주 모임이고 무려 황해도 김치로 만든 음식이어서 와인보다는 전통 증류 소주나 전통 청주(이양주)가 어울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20대 때 미국 맥주를 사던 사러가를 찾았다. 하 그렇지만 전통주가 너무 없었다. 반면 수입 맥주는 여전히 많았다.
그런데 작은 냉장고에 ‘막걸리 사러가’가 있는 것이 아닌가? 처음에는 “잘못 봤나”라고 생각했다. 사러가 막걸리라니. 그런데 자세히 보니 정말 사러가 막걸리가 아닌가. 막걸리는 2종류였는데 레몬딜맛, 애플시나몬맛이었다.
전날도 후배들과 과메기랑 가수 성시경 이름을 딴 경 막걸리를 먹었는데 경 막걸리가 너무 달았던 경험이 있어 이 막걸리에도 의심의 눈초리를 세울 수밖에 없었다. 우리나라 음식은 지금 단맛이 너무 지배적인데 술도 예외가 아니었다. 하지만 여기는 한때 나의 마음의 고향이었던 연희동 사러가 아닌가. 사러가의 저력을 한번 믿어보기로 했다. 애플 시나몬은 일단 제목에서부터 단 느낌이 올라오니까 그래서 산도를 강조했을 것 같은 레몬&딜을 골랐다.
이 막걸리는 연희동에 있는 전통주 양조장인 같이양조장이 사러가와 함께 작년부터 만든 술이다. 2020년 문을 연 같이양조장은 연희민트, 연희유자, 연희멜론 같은 연희 시리즈 막걸리는 만들었다. 모두 ‘가향주’다. 쌀과 함께 꽃이나 허브 등을 넣고 술을 빚어 향이 첨가된 술을 뜻한다.

사러가 막걸리, 맛도 스토리도 탄탄
사러가가 같이양조장과 콜라보한 술은 모두 가향주였다. 인스타그램을 찾아보니 작년 봄부터 벚꽃, 자두, 시소, 밤, 레몬 등을 소재로 계절별로 막걸리를 선보였다. 내가 산 레몬 딜 막걸리는 윈터 콜렉션이었다. 개인적으로 여름 막걸리로 내놓았던 자두 시소 막걸리의 맛이 궁금했다. 둘다 내가 좋아하는 식재료인데다 여름 날씨와 아주 잘 어울릴 것 같아서다.
막걸리의 가격은 1만3800원. 막걸리치고는 싼 가격은 아니지만 황해도 호박 김치를 영접하는데 이 정도는 지불해야 할 것 같았다. 한라산 소주 21도나 화요를 만지작하다가 놔뒀다. 너무 센 술을 마시며 사러가 막걸리의 맛과 향이 묻힐 것 같았다.
팜앤라이프 연희매장에 가보니 호박김치찌개가 이미 차려져 있었다. 하루 숙성돼야 깊은 맛이 나기 때문에 어제 져녁 끓여놓았다고 한 대표가 일러준다. 역시 전문가였다. 김치찌개의 맛이 너무 궁금했다. 시금치 무침, 콩나물, 계란말이 같은 정겨운 음식과 함께 누룩발효두부, 해초로 만든 감태로 만든 감태지 같은 귀한 음식도 있었다. 누룩발효두부는 치즈처럼 부드러웠고 감태지에서는 바다향이 진하게 느껴졌다.
황해도식 호박김치찌개는 맛있었다. 달지도 시지도 않은 균형잡힌 맛이었다. 시중의 김치찌개와 달리 약간의 무거운 맛도 있었다. 양파나 대파로 단맛을 내지 않고 호박으로만 승부해서 나는 중후함이었다. 돼지고기는 앞다리였다. 살과 비계에 김치양념이 배여 구수했다. 집에서 먹는데 집에서 먹지 않는 것 같은 균형 잡힌 맛이었다.
사러가 먹걸리는 황해도식 호박김치찌개와 잘 어울렸다. 달지도 산도가 높지도 않았다. 12도의 높은 도수가 기름진 음식을 잡아주었다. 곡물의 향이 주욱 밀려왔고 마지막으로 딜향이 살짝 났다. 딜은 해산물과 맞을 것 같았는데 돼지고기의 잔맛을 잘 마무리해주었다. 깔끔했다. 생각보다 괜찮았다. 다른 멤버들의 반응도 좋았다.
다행이었다. 전통주가 맛이 있는 것은 깜짝 놀랄 만큼 맛이 있지만 반대의 경우도 많다. 사실 걱정을 많이 했다. 귀한 김치찌개를 망칠까봐 우려됐다. 내가 멤버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니까 그냥 스파클링 와인을 사오지 그랬냐는 반응도 있었다. 평범한 요리라면 큰 고민 없이 유럽의 스파클링 와인을 들고 왔겠지만 난생 처음 먹는 전통 음식이어서 전통주로 예우하고 싶었다고 답했다. 전통주 가운데 내가 주로 고르는 술은 해창막걸리, 진맥소주, 삼해소주, 추사소주 정도다. 아직은 수퍼나 마트에 확실하게 믿을 수 있는 전통주가 많지 않은 것 같다. 상당수 전통주가 쌀, 밀 등의 곡물과 감, 사과같은 과일에서 100% 향과 맛을 뽑아내는 게 아니라 인공감미료나 과당에 의존하고 있는 게 우리 전통주 시장의 현실이다.
이런 현실에서 사러가의 막걸리는 눈여겨 볼 만한 술이다. 첫 번째는 한 동네의 쇼핑센터가 이렇게 자신의 이름을 달고 막걸리를 내는 것은 쉽지 않은 용기다. 막걸리는 생각보다 유통기간이 길지 않다. 팔리지 않으면 손해를 감수할 수밖에 없다. 두 번째는 연세대, 안산, 화교 학교, 카페 거리라는 연희동의 문화가 잘 녹아 있는 콘셉트의 막걸리를 선보였다는 점이다. 정교한 기획력과 이를 뒷받침해 주는 전통주의 맛이 잘 어울려져 있다. 스타에 의존하거나 외국에서 만든 전통주라며 별 특색도 없는 술을 마케팅으로 밀어붙이는 요즘 세태와는 확실한 차별점이다. 잠시 연희동에 살았던 옛 동네 주민의 눈에, 사러가 막걸리는 연희동의 우아한 이미지를 더 빛나게 해주는 역할을 하는 것 같다.
*권은중 전문기자는 기자로 20여 년 일하다 50세에 이탈리아 북부 피에몬테의 ‘외국인을 위한 이탈리아 요리학교(ICIF)’에 유학을 다녀왔다. 귀국 후 , 경향신문, 연합뉴스, 조선일보 등에 음식과 와인 칼럼을 써왔고, 관련 강연을 해왔다. 『와인은 참치마요』, 『파스타에서 이탈리아를 맛보다』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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