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남순대국, 정갈한 수육과 순대
할머니들의 지혜 모아놓은 듯
온갖 부위 든 순댓국도 별미
[블록미디어 권은중 기자] 순대에 대해 고백하자면, 나는 10여년 전까지 당면 순대와 야채 순대만 먹었다. 순대 마니아들이 좋아하는 피순대나 돼지 내장을 먹지 못했다. 유일하게 먹었던 돼지 내장이 허파였다. 어릴 때부터 느낀 거지만 허파의 그 오밀조밀한 맛이라니. 그런데 순댓집에 가서 “허파만 주세요”라고 하기 어렵지 않나? 그래서 나는 몇 년전까지만 해도 순댓국 가게에 가서 “내장 빼고”를 외쳐야 했다. 그러면 그때 주변에서 “뭐야? 아직 순대 초보자군”이라는 지청구를 들어야 했다.
맞다. 당면순대는 원래 1960년대 이전에는 우리나라에 존재하지 않았던 공장 순대다. 당연히 전 세계 어디에도 없다. 1970년 당면공장에서 짜투리 당면을 돼지피와 섞어 젤라틴 등으로 만든 케이싱(외피)에 넣어서 만든 게 당면 순대다. 민족의 지혜와 기품이 녹아든 전통 순대 요리와는 살짝 비껴서 있다.
순대 초보자였던 내가 업그레이드된 까닭
세계 어느 나라나 동물의 내장을 먹는다. 왜냐하면 동물의 내장은 영양이 뛰어나고 가장 부드러운 부위다. 대신 가장 먼저 상한다는 단점도 있다. 가축 살생을 금하고 대신 생선을 먹던 일본은 생선의 내장을 먹는다. 도미 위, 방어 창자, 아귀 간은 아주 맛이 있다.
먹는 거라면 다른 민족에 뒤지기를 싫어하는 우리나라에는 당연히 전통 순대가 존재해 왔다. 특히 이북 지방과 호남 지방에서 많이 먹었는데 동네 잔치에나 볼 법한 귀한 음식이었다고 한다. 특히 함경도에서는 노인들 환갑, 칠순 잔치에 순대가 쓰였는데 순대가 크면 클수록 진귀하다고 해서 큰 창자로 만든 대창 순대가 발달했다. 호남 지방에서 유명한 피순대는 고려시대 몽골의 말 보급기지 역할을 했던 제주도의 피순대(‘수애’라고 한다)가 전해진 것으로 보고 있다. 당시 몽골군은 동물의 말린 내장을 들고 이동하다가 여기에 곡물을 섞은 ‘게데츠’를 전투식량으로 먹었다. 이게 제주도를 거쳐 호남으로 전해졌 피순대가 됐다는 설이 있다.
대창 순대와 피순대는 순대의 원류이자 고급 음식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나는 순대를 얼마 전까지 입에도 대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대창 순대와 피순대를 즐긴다. 내가 이렇게 입맛이 바뀌었던 것은 이탈리아 유학을 다녀오면서부터였다. 이탈리아를 비롯해 유럽에서는 우리가 겨울을 대비해 김장을 하고 채소를 말리 듯, 돼지를 잡아서 내장과 고기를 염장한다. 우리가 아는 햄과 베이컨이다. 이 짠맛의 햄을 빵에 올려 먹고 햄을 넣고 수프나 스튜를 끓여서 긴긴 겨울을 견뎠다. 그러니까 유럽인들에게 돼지고기는 우리의 김치와 비슷한 구실을 했다.
그래서 유렵에서는 엄청나게 햄이 발달했다. 돼지고기 햄뿐 아니라 말, 소, 당나귀 햄도 있지만 이건 호사가들을 위한 것이다. 본질은 돼지다. 먹는 거에 지극정성인 이탈리아인들은 돼지고기 햄에 오직 소금과 향신료 약간만 넣는 걸 최고로 친다. 그리고 여기에 바람과 시간을 입힌다고 허풍을 떤다. 맨처음에는 허세라고 생각했다. 햄 하나에 고대 로마부터 시작해서 중세 수도사에, 르네상스까지 거들먹 거리는 이들을 보고 있자면 약장수같았다. 하지만 부러웠다. 이탈리아에서는 햄을 보통 1년을 염장해서 판다. 소금하고 향신료만 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고대 로마나 중세 조상님들와 똑같이 먹는 게 이들의 목표다. 돼지에 약도 안치고 유전자 조작도 안하고 방부제도 안쓴다. 공장 된장과 중국산 김치를 먹으면서 전통의 맛을 운운하는 우리나라 음식 현실에서 진짜 부러웠다.
이탈리아에서 알게 된 진짜 돼지맛
하지만 온갖 첨가제에 발색제에 방부제까지 쳐서 만든 공장햄을 수십년간 먹어온 내가 이런 자연 친화적인 햄을 당연히 먹지 못했다. 순대에서 나오는 돼지 내장과 비슷한 냄새인데 뭔가 더 바늘같이 찌르는 향이 유럽의 오리지날 햄에서 느껴졌다. 그런데 이탈리아 친구들 집에 초대를 받아서 가면 전국의 유명한 수제 햄(살루미라고 한다)과 손으로 만든 빵을 내놓았다. 진짜 딱 이 음식만 내놓는다. 또 식당에 가면 주는 공짜 안주(이탈리아에서는 술을 시키면 안주를 공짜로 준다. 이를 아페르티보라고 한다)도 빵에 살루미, 올리브였다. 한마디로 자연산 수제 햄을 못 먹으면 이탈리아에서는 배를 주린다는 의미였다.
이렇게 생햄을 먹으라는 강열한 압박을 받으면서 이탈리아에서 한 달쯤 살다보니, 나는 어느 순간부터 이탈리아 수제 햄의 맛을 구수하게 느까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낯설던 이탈리아 생햄의 향이 고상하게 느껴졌다. 그 다음부터는 일사천리였다. 고체가 아니라 액체를 채워넣은 것 같은 이탈리아의 기괴한 소시지와 햄들도 맛있었다. 송아지햄은 물론이고 당나귀 햄도 먹게 됐다. 이탈리아에서 제일 비싼 햄은 당나귀 햄이다.
이렇게 이탈리아에서 돼지고기에 훈련을 받다 보니 한국에 돌아와서 순대가 어렵지 않았다. 당면과 채소순대만 먹던 내가 내장 순대를 먹기 시작했다. 심지어 순댓국 집을 찾아서 다니기도 했다. 유럽의 돼지 냄새를 없애는 방식과 한국의 돼지 냄새를 없애는 방식은 차이가 있다. 이 차이에서는 오는 순대의 돼지향은 나에게 꽤 은은했다. 그래서 나는 순대를 먹을 때 프랑스나 이탈리아의 동물 가죽향이 강한 와인을 마신다. 와인이 소주보다 더 이런 향의 묘미를 증가시킨다. 이른바 일치형 페어링이다.

해남순대국, 돼지 수육이 백미
그렇게 맛있는 순대집을 하나씩 알아가고 있을 때 나에게 혜성같이 등장한 집이 약수동 ‘해남순대국’이다. 사실 이 집은 이 집 근처에 있는 에스프레소 바인 리사르 커피집 때문에 알았다. 에스프레소에 미친 후배가 이 집에서 만나서 순대국을 먹고 이탈리아식 에스프레소를 마시러 가자고 해서 가게 됐다.
리사르 커피도 맛있었지만 이 집 순대도 꽤 놀라운 맛이었다. 일단 기본인 순댓국이 너무 담백했다. 순대국에 돼지 허파와 염통은 물론이고, 귀, 혀까지 넣어 줬다. 돼지 귀의 오돌뼈가 그렇게 맛이 있는지 이 집에서 처음 알았다. 또 다른 순댓국 집과 달리 국물이 과장되지 않아 좋았다. 순댓국집에서 돼지뼈가 아니라 소뼈 국물을 쓰는 집이 많은 탓이다.
순댓국도 맛있지만, 내 생각에 이 집의 시그니처는 돼지 수육이다. 보통 순댓국집은 모듬 순대를 내놓는데 이 집은 앞다리에다 오소리감투 같은 내장과 순대를 함께 내놓는다. 아마 순댓국의 국물을 부산 돼지 국밥 집처럼 앞다리 등으로 내고 이 고기를 내장 순대와 함께 내놓는 것 같다. 그래서 돼지 혀나 위 같은 특수 부위와 앞다리 수육처럼 대중적인 부위를 함께 먹어 돼지 한마리를 통째로 먹는 것 같은 만족감을 느낄 수 있다.
게다가 된장 물에 찐 것인지 돼지의 잡내가 전혀 나지 않고 아주 촉촉하다. 맛도 맛이지만 향이 구수하다. 할머니 집에 놀러온 것 같은 포근함을 준다. 그래서 나는 우울하고 피곤한 날에 이 집을 찾는다. 혼자 가면 순댓국을 먹고 여럿이 가면 모듬 순대를 시켜 막걸리를 한잔 하고 입가심으로 순댓국을 나눠 먹는다.
아쉬운 점도 있다. 나는 이런 맛있는 돼지 특수 부위는 값싼 소주나 막걸리랑 마실 게 아니라 멋진 청주나 전통 소주와 마셔야 할 것 같은 부채감을 갖는 사람이다. 아쉽게도 이 집은 그런 질 좋은 전통주가 마련되어있지 않다. 강남 고급 한식집처럼 병당 2만원쯤하는 해창막걸리 정도는 팔았으면 좋겠다.
한때 분식집 당면 순대만 먹을 줄 알았던 내가 돼지 귀와 혀를 즐길 줄이야. 세상이 변하 듯이 사람 입맛도 변한다. 그렇지만 지혜의 음식인 우리 전통 순대의 맛만은 변하지 않았으면 한다.
■ 주소: 서울 중구 다산로8길 8(약수역 7번 출구에서 70m)
■ 메뉴: 순댓국(1만2000원), 수육(소 2만 8000원)
*권은중 전문기자는 기자로 20여 년 일하다 50세에 이탈리아 북부 피에몬테의 ‘외국인을 위한 이탈리아 요리학교(ICIF)’에 유학을 다녀왔다. 귀국 후 , 경향신문, 연합뉴스, 조선일보 등에 음식과 와인 칼럼을 써왔고, 관련 강연을 해왔다. 『와인은 참치 마요』, 『파스타에서 이탈리아를 맛보다』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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