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토후 소비뇽 블랑, 톡톡 튀는 낱낱의 향이
명절 전과 만나면 의외의 시공간 보여줘
전통 막걸리와 비교하는 재미도 쏠쏠
[블록미디어 권은중 기자] ‘명절 음식의 꽃’은 잡채와 전이다. 잡채는 전통적인 오방색(흑,백, 청, 황, 홍색)을 써서 시각적 충만감을 주며 당면의 쫄깃한 식감이 특징이다. 전은 고려시대부터 왕실 제례에도 쓰였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의례의 꽃’인 음식이다.
나는 전에 한표다. 어릴 때는 잡채가 최고였다. 잡채는 나에게 명절과 잔치를 의미했다. 그 들뜬 분위기가 좋았다. 전은 어린 나에게 그 정도의 축제성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김치전, 파전 같은 전을 일상적으로 먹을 수 있어서 그런 것 같았다.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명절 전이 좋아진다. 얼마 전까지 간 돼지고기로 만든 동그랑땡이 가장 맛있었는데, 마흔이 넘으면서부터 생선전이 맛있어지더니, 지금은 심심한 배추전이 최고다.
올해 추석 명절은 길었다. 10일 금요일 월차만 내면 열흘을 쉴 수 있었다. 그러다보니 가족이나 친족 모임이 많았고 명절 음식도 자주 먹게 됐다. 명절이다 보니 전통주인 청주나 막걸리를 반주로 마셨다. 나도 매년 명절에 본가에 갈 때에는 늘 청주나 막걸리를 사가져 간다. 당연히 효소제나 인공 감미료를 쓰지 않은 전통 방식의 막걸리를 고른다. 해창 막걸리나 임진강평화막걸리를 가장 선호한다.
명절 때, 가족들이나 친척들은 항상 “전에는 역시 막걸리지”라고 말한다. 생각해 보면 돌아가신 아버지도 전과 막걸리를 즐겨 드셨다. 나도 어울리는 자리에서는 막걸리를 최고라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집에 본가의 전을 싸가져 와서 마시는 술은 따로 있다. 뉴질랜드 쇼비뇽 블랑이다.

뉴질랜드 쇼비뇽 블랑, 전과 환상 조합
이번 열흘 동안의 긴 명절에, 나는 막걸리를 많이 마셨다. 그러다가 추석 다음날, 밤에 출출해서 본가에서 싸온 전을 에어프라이어에 데워 뉴질랜드 소비뇽 블랑과 마셨다. 내가 이날 딴 와인은 토후 말보로 쇼비뇽 블랑이었다. 토후 와이너리는 뉴질랜드 마오리족이 1998년 설립한 최초의 와이너리다. 이 와이너리는 조상과 자연을 숭배한다는 뜻으로 설립 뒤 지금까지 친환경 농법을 고집하고 있다. 사족이지만 마오리족과 한민족은 고사리를 숭배하고 이를 조상에게 바치는 세계에서 유이한 민족이다.
그런데 내가 이날 마신 소비뇽 블랑은 내가 마셔왔던 소비뇽 블랑이 아니었다. 두 가지에 놀랐다. 먼저, 질감이었다. 막걸리만 마셨더니 와인에서 젤리같은 질감이 처음 느껴졌다. 막걸리보다 높은 13도의 알코올 도수 탓일 것이다. 막걸리는 보통 6도이다. 내가 좋아하는 해창은 9도다. 보통 와인이 입안에서 느껴지는 느낌을 바디감이라고 말하는데 뉴질랜드 쇼비뇽 블랑은 바디감이 와인 가운데 가장 약한 축에 낀다. 그런데 막걸리만 줄창 먹다가 이날 밤 와인을 마셔보니 처음 느껴보는 질감이 혀에 밀려들었다. 바디감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젤리같은 느낌이 나지 않았을 것이다. 금속성의 이물감도 있었다. 와인이 가진 미네랄리티와 높은 도수가 이런 질감으로 느껴진 것 같았다. 개화기 때 처음 파란 눈의 서양인을 본 우리 조상들이 갖던 놀라움이 이런 것이었을까?
향도 내가 알던 소비뇽 블랑과 확 달랐다. 막걸리는 복합적인 곡물 발효향이 난다. 특히 내가 먹는 전통발효방식의 막걸리는 꽃향과 과실향이 난다. 합성감미료로 내는 가짜 향과는 천지 차이다. 그런 조화로운 향에 며칠 취했있다가 맡은 쇼비뇽 블랑의 향은 개별의 향이었다. 깎아낸 풀, 나뭇잎, 청사과, 자몽, 귤, 약간의 민트와 레몬그라스. 그런 향을 마치 성냥개비처럼 하나하나 모아서 공을 들여 와인병 모형을 만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전을 먹고 이런 개별의 맛과 향들로 가득한 와인을 머금으면, 맛은 또 달라진다. 여러개의 개별적인 개성 강한 와인의 향이 전의 기름기와 짠맛과 부드럽게 섞여 길고 섬세한 여운을 남긴다. 그 고양감이라니. 내 손을 잡고 나를 어디론가 데려가고 있는 레이스 달린 흰 색 치마를 입은 외국인 여성과 풀밭을 걷고 있는 느낌이었다. 전혀 뜻밖의 시공간이 펼쳐졌다. 뉴질랜드 소비뇽 블랑과 전을 먹은 게 하루 이틀이 아니었는데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이 와인은 전뿐 아니라 잡채나 불고기와 같은 음식과도 잘 어울린다. 열흘이나 되는 긴 명절 동안 줄창 마셨던 막걸리가 주는 선물같은 경험이었다.
뉴질랜드 남섬 지역인 말보로에서 빚는 소비뇽 블랑은 뛰어난 술이다. 내가 마신 와인의 절반은 아마 뉴질랜드 소비뇽 블랑이라고 할 만큼 나는 이 지역 와인을 많이 마셔왔다. 하지만 이 와인에서 이런 질감과 고양감을 느낀 건 이번 추석이 처음이었다. 앞으로 말보로 소비뇽 블랑은 물론이고 전통 방식으로 만든 우리 막걸리를 더 많이 마셔야겠다. 그러면 와인이 더 맛있어질 것 같다.
* 권은중 전문기자는 기자로 20여 년 일하다 50세에 이탈리아 북부 피에몬테의 ‘외국인을 위한 이탈리아 요리학교(ICIF)’에 유학을 다녀왔다. 귀국 후 경향신문과 연합뉴스 등에 음식과 와인 칼럼을 써왔고, 관련 강연을 해왔다. 『와인은 참치 마요』, 『파스타에서 이탈리아를 맛보다』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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