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율이 요동치는데, 굳이 원화로 바꾸지 않고 내 지갑 속 달러로 바로 점심값을 낼 수는 없을까?”
해외여행을 자주 다니거나 글로벌 비즈니스를 하는 분들이라면 한 번쯤 해봤을 상상이다. 그런데 이 상상은 이미 해외 업체들을 통해 현실이 됐고, 한국의 가장 보수적인 금융권에서도 현실이 되려 하고 있다.
지난 14일, KB국민카드가 ‘하이브리드 결제 시스템’ 이라는 흥미로운 기술에 대해 특허를 출원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내용은 간단하면서도 파격적이다. 우리가 쓰는 신용카드에 가상자산 지갑을 연동해 두면, 결제할 때 우선 지갑에 있는 ‘스테이블코인(가치 연동 코인)’으로 결제가 되고, 만약 코인이 부족하면 그 즉시 알아서 신용카드 승인으로 넘어가는 기술이다.
사진=X(옛 트위터)kryptobaby777 게시물 갈무리.
쉽게 말해, 내 코인 지갑에 100달러(약 14만원) 어치 스테이블코인이 있다면 편의점에서 컵라면을 살 때 이 코인이 먼저 빠져나가고, 잔액이 없으면 평소처럼 카드값이 청구되는 식이다. 상점 주인은 손님이 코인으로 냈는지 카드로 냈는지 알 필요가 없다. 그저 ‘결제 완료’ 메시지만 뜨면 되니까. 이미 카스트 (KAST) 카드 같은 스타트업을 통해서 일부 국내에서 활용이 가능하다지만, 국내 대형 카드사가 이런 특허를 냈다는 것은 코인이 더 이상 거래소 화면 속의 ‘숫자’가 아니라 우리 지갑 속의 ‘현금’으로 진화하고 있다는 강력한 신호이다.
대체 스테이블코인이 뭐길래, 카카오페이나 삼성페이로도 충분한 지금 이 시점에 결제 시장을 뒤흔들고 있는 걸까? ‘안녕 웹쓰리’ 첫 번째 시간에는 투기판을 떠나 우리 삶으로 들어오고 있는 스테이블코인 결제 혁명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투기판의 칩? 아니요, 이미 ‘돈’입니다
출처=아르테미스 애널리틱스
“비트코인, 그거 도박 아니야?”
아직도 많은 분이 코인을 변동성 심한 투기 자산으로만 생각한다. 하지만 암호화폐는 이미 우리 삶으로 조용히, 하지만 빠르게 파고 들고 있다. 2023년부터 2025년 사이, 전 세계적으로 스테이블코인을 활용한 카드 결제 규모는 연평균 106%라는 경이적인 성장률을 기록했다.
현재 연간 결제 규모는 약 180억달러(약 24조원)에 달한다. 이는 그동안 코인 시장의 주류였던 개인 간(P2P) 송금 규모와 맞먹는 수치이다. 즉, 사람들이 이제는 코인을 다른 지갑으로 옮기는 데(송금) 쓰는 게 아니라, 밥을 먹고, 택시를 타고, 넷플릭스를 결제하는 데(소비) 쓰고 있다는 뜻이다.
왜일까? ‘안정성’과 ‘호환성’ 때문이다. 1달러의 가치를 보장하는 USDT(테더)나 USDC 같은 스테이블코인은 변동성이 없다. 게다가 비자(Visa)나 마스터카드 같은 글로벌 네트워크가 이들을 품으면서, 우리는 복잡한 블록체인 지갑 주소를 몰라도 카드를 긁는 행위만으로 블록체인 금융을 이용하게 됐다. 페이팔(PayPal)이 자체 스테이블코인(PYUSD)을 내놓고, 글로벌 핀테크 공룡 스트라이프(Stripe)가 코인 결제 기능을 탑재한 것도 이 거대한 흐름 때문이다.
미국의 ‘지니어스 법’과 폴리곤의 2억5000만달러 승부수
사진=백악관 공식 X(옛 트위터)
이런 변화의 기저에는 ‘규제의 명확화’가 있었다. 지난해 7월, 미국에서는 일명 ‘지니어스 법(GENIUS ACT)’이 제정됐다. 이름부터 거창한 이 법안은 스테이블코인을 ‘결제 수단’으로 공식 인정하는 대신, 발행사들에게 엄격한 의무를 부과했다.
첫째, 100% 지급준비금이다. 즉 고객이 맡긴 돈만큼 안전한 자산(현금이나 미 국채)을 보유해야 한다는 것. 둘째, 이자 지급 금지다. 스테이블코인 보유자에게 이자를 주지 말 것.
이자가 없는데 누가 쓰냐고? 오히려 이 조항 덕분에 스테이블코인은 ‘투자 상품’이 아닌 순수한 ‘디지털 현금’으로 자리 잡았다. 은행들은 예금이 빠져나갈 걱정을 덜었고, 기업들은 법적 리스크 없이 이 ‘디지털 달러’를 결제망에 태울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흐름에 빠르게 올라탄 곳 중 하나가 바로 폴리곤(Polygon)이다. 원래 기술 개발에 집중하던 이 블록체인 기업은 올 1월, 무려 2억5000만달러(약 3300억원) 를 들여 미국 결제 회사 코인미(Coinme)와 지갑 회사 시퀀스(Sequence)를 인수했다. “우리는 더 이상 기술만 팔지 않는다. 규제받는 합법적인 돈의 고속도로를 깔겠다”는 선언인 셈이다.
한국의 기회: ‘환치기’를 넘어 양지로
그렇다면 한국은 어떨까? “우리는 신용카드도 잘 되고 토스도 편한데 굳이 스테이블코인이 필요해?”라고 물을 수 있다. 하지만 시야를 ‘국경 밖’으로 돌리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특히 한국이 공들이고 있는 의료관광 시장이 대표적이다.
서울 강남의 성형외과를 찾는 외국인 환자들을 생각해 보자. 중국이나 동남아에서 온 환자가 수천만 원의 수술비를 결제하려면 복잡한 외환 송금 절차를 거치거나, 현금 뭉치를 들고 와야 했다. 이 과정에서 브로커들이 끼어들어 불법 환전, 일명 ‘환치기’를 알선하고 10~20%의 수수료를 떼어가는 지하 경제가 형성되어 있었다.
관세청에 따르면 최근 5년간 적발된 불법 외환거래 규모만 11조 원에 달하고, 그중 80% 이상이 디지털자산을 이용한 것이었다. 역설적이게도 이는 그만큼 가상자산이 국경 간 송금에 탁월하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국내 금융사들은 이 ‘어둠의 수요’를 양지로 끌어올리고 있다. BC카드는 이미 지난해 말, 외국인 관광객이 본국에서 쓰던 스테이블코인을 국내에서 원화처럼 쓸 수 있게 하는 결제 파일럿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관광객은 환전 수수료를 아끼고, 병원과 상점은 투명하게 매출을 정산받을 수 있는 구조이다. KB국민은행을 비롯한 5대 시중은행 컨소시엄이 원화 기반 스테이블코인 발행을 준비하는 이유도 바로 이 ‘국경 없는 금융 고속도로’의 통행료를 놓치지 않기 위함이다.
안녕 웹쓰리: 금융의 고속도로가 뚫린다
KB국민카드의 특허 출원은 단순한 기술 과시가 아니다. 그것은 “이제 블록체인이 당신의 지갑 속으로 들어갈 준비가 끝났다”는 신호이다.
우리가 해외 직구를 할 때 복잡한 전신환을 보내지 않고 카드 번호만 입력하듯, 웹3 기술은 금융의 뒷단으로 숨어들고 있다. 소비자는 그저 ‘더 싸고, 더 빠르고, 더 편한’ 결제를 경험할 뿐, 그것이 블록체인인지 아닌지 알 필요가 없는 세상이 오고 있는 것이다.
스테이블코인 결제 혁명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 달러를 쥐고 서울에서 라면을 사 먹고, 원화를 쥐고 뉴욕에서 베이글을 사 먹는 일이 ‘환전’이라는 단어조차 떠올리지 않고 가능한 세상. 투기의 시대를 넘어, 효용의 시대로 진입한 웹3가 우리에게 건네는 첫 번째 인사이다.
“안녕, 웹쓰리. 이제 우리 밥값 정도는 코인으로 결제해도 되겠지?”
신영선블록미디어 어드바이저
· 현 헬로 웹쓰리 설립자
· 전 글로벌 암호화폐 거래소 제품 총괄
· 전 오리진 프로토콜 프로덕트 매니저
· 전 쿠팡 시니어 프로덕트 오너
· 전 우버 프로덕트 및 오퍼레이션 매니저
신영선 블록미디어 어드바이저는 웹3, 제품 혁신, 플랫폼 확장에 대한 깊은 전문성을 가진 업계의 오피니언 리더이다. 그는 다양한 플랫폼에서 주요 제품 및 운영 역할을 맡아 높은 영향력을 가진 소비자 제품을 구축하고 확장해 왔다. 블록체인 기술과 글로벌 시장에 대한 폭넓은 경험을 바탕으로 국내외 디지털 자산 기업들을 대상으로 활발한 자문 활동을 펼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