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년 외환위기 당시 정부의 대처방식과 공과에 대해서는 아직도 이견이 엇갈린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당시 상황이 국가부도에 이를 정도로 중차대한 지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대통령과 경제부총리 사이에 충분한 정보교류가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점이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강경식 경제부총리에 대한 신뢰를 상실한 지 오래였다. 강 부총리는 97년 9월부터 “열린 경제로 가기 위한 국가과제”라는 제목으로 전국 순회강연을 진행하고 있었다. “한국경제는 펀더멘털이 튼튼하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는게 강연의 요지였다.

하지만 10월 중순 이후로 예정된 강연은 모두 취소해야만 했다. “한가한 소리 좀 그만하라”며 김 대통령이 직접 제동을 걸고 나선 것이다.

이 무렵 부터 김 대통령은 강 부총리 보다는 이경식 한은 총재나 홍재형 전 장관 등 다른 루트를 통해 경제상황을 체크하기 시작했다. 일부 경제부처에는 “재경부 지시를 받지 말고 내 지시만 받으라”며 엄명을 내리기까지 했다. 김 대통령이 강 부총리를 어느 정도 불신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 전쟁터에서 장수를 바꾸다

김 대통령은 결국 11월 19일 강 부총리를 전격 경질한다. 후임에는 임창렬 당시 통상산업부 장관이 임명됐다. 강 부총리는 밤샘 작업을 해가며 마련한 금융시장안정대책을 보고하기 위해 19일 오전 대통령 집무실에 들어섰으나 “이제 그만 쉬라”는 대통령의 통고를 받고 돌아서야 했다.

이유야 어쨌든 IMF 구제금융 협의가 막 시작되는 시점에 경제사령탑이 교체됨에 따라 적지 않은 혼선이 빚어졌다. IMF 구제금융 신청사실 공표가 예정보다 이틀이나 늦어진 것도 이 때문이었다.

사흘 전인 11월 16일 캉드쉬 총재와 강 부총리간의 비밀회동에서 양측은 한국 정부가 구제금융 신청 사실을 19일 공식 발표하고, 다음날인 20일 IMF 실사단 1진이 한국에 입국하는 것으로 잠정 합의한 바 있다.

그러나 19일 취임한 임창렬 신임 부총리는 이 날 “금융시장 안정을 위한 종합대책”을 발표하면서 캉드쉬 총재와 합의한 IMF 구제금융 신청 사실을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 기자들이 “IMF에 지원을 요청할 계획은 없느냐”고 묻자 “우방국들이 지원해주기만 하면 IMF 도움 없이도 해결이 가능하다”고 엉뚱한 답을 내놓기 까지 했다.

재경원 실무진들은 당황했다. 누구보다 당혹스러워 한 것은 미국과 IMF측이었다. 워싱턴에서 비행기표까지 끊어놓고 출국준비를 하던 IMF 실사단 3명은 다시 짐을 풀어야 했다.

다음날 오전 예정에 없던 루빈 미 재무장관의 성명이 튀어 나왔다.

“한국이 현 위기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금융체제를 강화할 수 있는 강력하고 효과적인 행동을 신속하게 취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더 이상 꾸물대지 말고 빨리 IMF에 지원을 요청하라는 압박이었다.

그렇다면 임 부총리는 왜 캉드쉬와 합의한 IMF행을 19일 발표하지 않았던 것일까.

임 부총리는 후일 이에 대해 “IMF행이 논의되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이날 발표해야 한다는 사실은 전혀 몰랐다”고 해명했다. 부총리에 임명된 당일 곧바로 금융시장안정대책을 발표하는 과정에서 적절한 업무 인수인계를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IMF 지원 여부에 따라 하루에 수억달러의 비용을 절감할 수 있었던 당시 상황에 비추어 어처구니 없는 실책이었다. 외환대란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맞아 정부의 정책집행시스템이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임 부총리는 세부사항을 다시 보고받은 후 결국 합의한 날짜보다 이틀 늦은 21일 밤 IMF 구제금융 요청 사실을 대외에 공표하게 된다.

◆ 협상 상대는 IMF 아닌 ‘미국’

구제금융 협상의 상대는 표면적으로 IMF였지만 막후에서 조정하는 실세는 미국이었다. 나이스 단장 등 IMF 파견단은 협상 실무자였을 뿐 최종 결정은 미국 재무부가 주도했다.

실무협상이 한창 진행되던 97년 11월 30일. 데이비드 립튼 미 재무차관이 비밀리에 입국했다. 립튼 차관은 미 재무부에서 IMF를 관할하는 책임자였고, 당시 한국 상황에선 그가 곧 IMF였다.

협상장은 힐튼호텔 19층이었고, 립튼 차관은 이 호텔 10층에 여장을 풀었다. 나이스 단장은 부지런히 10층을 들락거리며 차관의 지시를 받아 왔고, 협상장에 돌아와선 이를 그대로 요구했다.

당시 미국 정부는 한국의 IMF행을 유도하기 위해 적극적인 행보를 보였다. 한국이 다른 나라에서 자금을 빌리는 것을 막기 위해 각 국 정부에 ‘한국에 자금을 빌려주지 말라’며 압력을 넣기까지 했다. 일본과 중국에 돈을 빌리러 갔던 정부 대표단은 “IMF로 가지 않으면 한 푼도 지원할 수 없다”는 앵무새 같은 답변을 들어야만 했다.

협상이 막바지에 들어서자 미국 대통령까지 나섰다. 클린턴 당시 미 대통령은 11월 28일 김영삼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협상의 조속한 타결을 요구했다. “12월 첫 째주가 되면 한국은 파산이다. 협상을 조속히 마무리짓는게 좋을 것”이라는게 통화의 요지였다고 당시 청와대 관계자들은 증언한다.

세월이 어느 정도 흐른 후 학계 일각을 중심으로 “한국 외환위기는 미국의 음모에 말려든 결과”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한국 경제의 내부적 원인이 있긴 하지만 이 보다도 외부적인 요인이 더 크게 작용했다는 분석이었다. 음모론의 실체를 확인할 길은 아직 요원하다. 하지만 당시 한국 외환위기 수습 과정에서 미국이 모든 상황을 좌지우지 했던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당시 미국 정부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실례로 금융기관 외채만기 협상을 빼놓을 수 없다. 한국 정부 대표단의 노력도 주효했지만 이에 앞서 미국 정부 내부의 역학관계 변화가 협상 타결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는게 정설이다.

97년 12월 19일. 워싱턴 백악관.

클린턴 대통령 주재로 국가안보회의가 열렸다.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 윌리엄 코언 국방장관, 로버트 루빈 재무장관 등이 둘러 앉았다. 이날 회의의 의제는 한국의 외채 만기연장 문제였다.

루빈 재무장관은 시장논리를 들어 한국 채권의 만기연장 문제는 민간 금융기관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금까지 한국 상황을 이끌어온 미국 재무부의 입장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었다.

반론이 제기됐다. 코언 국방장관이었다.

“한국은 수 만명의 미군이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북한과 총을 겨누고 있는 나라다. 한국의 경제위기는 이 같은 상황을 감안해서 풀어가야 한다.” 올브라이트 국무장관도 코언 장관을 거들고 나섰다.

이 날 회의의 결과는 한국에 대한 자금지원을 조기에 재개하고, 은행들의 외채 연장을 적극 유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동안 한국을 옭죄어 왔던 경제문제가 안보논리로 해결되는 순간이었다. 이 회의 이후 미국 은행들의 태도가 눈에 띄게 호의적으로 바뀌었고, 결과적으로 한국의 외채 만기협상은 순탄하게 타결됐다.

◆ 위기 극복도 ‘빨리빨리’

외환위기는 부지불식간에 갑자기 터진 것이 아니었다. 오랜 시간에 걸쳐 누적된 한국 경제의 고질병들이 한꺼번에 불거져 나온 결과였다. 정경유착, 금융부실, 차입경영, 부패관행, 족벌경영 등 우리 경제의 취약점들이 통제불가능한 수준까지 한꺼번에 노출된 결과가 바로 외환대란이었다.

그러나 이런 요인들만으로 외환위기가 발발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아무리 사소한 사고라도 결과를 따져보면 수십가지 요인이 동시에 잘못돼 사고가 발생했음을 발견하곤 한다. 97년 외환위기가 바로 그런 경우다. 누적된 병인과 구조적인 문제점들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당시 정부가 사태를 좀 더 냉철히 파악했다면, 좀 더 빨리 대처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악화될대로 악화된 한미관계, 경제팀의 오판과 실기, 정치적 문제해결 노력 부족 등 뒤돌아보면 위기를 조장한 현실이 한 둘이 아니다. 위기가 터진 후 “내 탓이오”를 외치며 스스로를 자책하는 경제학자와 애널리스트의 글이 언론에 떠돌았지만 다 부질없는 일이었다. 외환위기는 결국 현실화됐고, 엄청난 희생을 치르고 나서야 우리는 위기를 넘어섰다.

위기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대마불사의 신화가 깨졌고, 사상 초유의 구조조정이 단행됐다. 조기퇴직, 사오정, 노숙자 등 새로운 단어들이 등장했다. 위기 속에서 한국인들의 저력은 빛을 발했다. 장롱 속에 묻어 두었던 금붙이를 찾아내 나라 살리는데 써달라며 너도나도 긴 줄을 섰다. 세계가 경이의 눈으로 한국의 위기수습 과정을 지켜봤다.

결과는 놀라움이었다. 한국을 압축하는 ‘빨라빨리’의 의미를 설명이라도 하듯 위기극복 과정 역시 놀라울 정도로 빨랐다. 97년 당시 바닥을 드러냈던 외환보유고는 불과 3년새 다시 1000억달러를 넘어섰고, 97년 82억달러 적자였던 경상수지는 2000년말 100억달러 이상 흑자로 돌아섰다. IMF에서 빌려온 빚도 4년이 안돼 모두 갚아버렸다.

당시 구제금융 협상을 통해 IMF로 부터 차입한 자금은 보충준비자금 134억달러와 크레딧트란셰 자금 61억달러 등 모두 195억달러였다. 97년 12월 55억달러가 처음 들어온 것을 시작으로 99년 5월까지 모두 9차례에 걸쳐 입금됐다. 2004년 5월까지 분할상환한다는 조건이었다.

한국은 이 자금을 당초 계획 보다 무려 2년 9개월이나 앞당겨 2001년 8월 전액 조기상환 해버렸다. 보충준비자금은 2000년 6월까지 상환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98년 12월 첫 상환을 시작해 9개월만인 99년 9월 모두 갚아 버렸고, 크레딧트란셰도 2001년 8월 전액 상환했다. IMF 자금을 빌려 쓴 다른 동남아나 중남미 국가에서는 볼 수 없는 경이적인 성과였다.

위기 수습의 마무리 사령탑을 맡아 2000년 8월 재정경제부 장관에 취임한 진념 전 부총리는 취임 직후 ‘CRIC’라는 표현을 사용해 눈길을 끌었다.

CRIC란 “위기 도래(Crisis) → 경제주체의 대응(Response) → 상황 개선(Improvement) → 위기를 잊는 자만감(Complacency) → 다시 위기 도래”의 머리 글자를 딴 것으로, “위기를 잊는 자만심이 결국 다시 위기를 부른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다시는 이런 위기를 맞지 말자는 정책 책임자로서의 다짐과 충고가 배어 있다.

97년 외환위기는 한국에 많은 상흔을 입혔지만 미래를 위해 배워야 할 교훈 또한 적지 않게 남겼다. 97년의 경험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2011년 유럽 재정위기 속에서도 한국경제가 굳건히 지탱하는 자양분으로 작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