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 박재형 특파원

블록체인 기술을 정치과정에 도입하기 위한 논의는 최근 매우 광범위한 영역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중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블록체인을 선거과정, 특히 투표에 이용하는 것인데, 블록체인 기술을 기반으로 하는 암호화폐를 이용한 정치 후원금 제도 역시 관심과 논란이 함께 더해가고 있다.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의 선거과정에서 가장 민감한 문제로 꼽히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정치 후원금이다.  즉 선거에 필요한 돈을 충당하고, 이 돈을 선거비용으로 사용하는 과정에서의 투명성과 합법성 등에 관한 문제들이다. 아무리 선거공영제 원칙에 따라 정부의 예산으로 선거를 시행한다고 해도 결국 각 정당과 후보자들의 자금 투입 없이는 정상적인 선거 경쟁이 이루어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비트코인 등 암호화폐, 디지털 통화가 새로운 대안 화폐로 부상하면서 암호화폐를 이용한 개인 및 정당에 대한 정치 후원금 기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미국, 한국 뿐 아니라 세계 각국에서 암호화폐에 대한 명확한 규제의 틀이 마련되지 못한 상황인 만큼 국가의 진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선거, 그리고 이 선거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정치자금에 암호화폐를 이용하는 문제는 정치권의 ‘뜨거운 감자’일 수 밖에 없다.

그러다보니 암호화폐를 정치 후원금으로 이용하는 문제는 정치권에서 다양한 갈등으로 비화하기도 한다. 지난해 미국 캘리포니아에서는 비트코인으로 정치 후원금을 받고 있는 한 후보와 암호화폐를 반대하는 상대 후보 사이 대결이 관심을 모았었다. 연방 하원의원 민주당 예비후보들인 이들은비트코인 정치 후원금을 놓고 논쟁을 벌였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의 선임 보좌관으로서 암호화폐 정책을 주도했으며, 연방하원의원 선거 민주당 후보 경선에 출마한 브라이언 포드 후보는 유권자들로부터 비트코인으로 후원금을 받으며, 이에 관한 TV 광고 등 선거 캠페인을 계속했다. 포드 후보가 비트코인 후원금 모금을 시작하자 유명 투자자 마이크 노보그라츠 등 암호화폐 지지자들의 후원이 줄을 잇기도 했다.

이에 대해 경쟁자인 데이브 민 후보 측이 포드 후보의 비트코인 후원자들을 “마약거래와 인신매매 단속에 반대하는 비트코인 투기꾼”으로 묘사하는 광고를 내보내면서 양 후보 진영의 갈등이 격화됐다. 민 후보는 한국계 미국인으로, 미 증권거래위원회(SEC) 변호사를 역임한 법학 교수 출신이다.

민 후보 측의 공격에 대해 포드 후보는 자신이 비트코인으로 후원금을 받는 이유는 그것이 가장 발달되고 비전 있는 기술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또 비트코인 후원금에 대한 이런 공격처럼 사람들의 새로운 기술에 대한 부족한 이해 때문에 자신이 의회에 진출하려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처럼 암호화폐 후원금을 둘러싸고 충돌했던 두 후보 모두 지역 민주당 후보 경선에서 탈락, 본선 진출에는 실패했다.

정치권을 중심으로 찬반 논란이 이어지고 있는 암호화폐 정치 후원금에 대해서 미국인들은 긍정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 지난해 가을 여론조사기관 클로버(Clovr)가 실시한 조사에서 응답자의 60%가 청치 후원금에서 암호화폐를 일반화폐와 똑같이 인정하는 것에 찬성했다. 이에 반대한다는 응답자는 21%에 그쳤다.

응답자의 54%는 암호화폐가 정치적인 기부를 하는 데 있어 충분히 안전하다는 생각을 밝혔다. 지지 정당에 따라서는 공화당 지지자의 63%, 민주당 지지자의 52%, 무당파의 45%가 암호화폐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이 안전하다고 평가했다. 이 조사에서 특히 정치인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부분은 응답자의 25%가 암호화폐로 정치 후원금을 기부할 수 있게 된다면 자신도 참여할 의향이 있다고 답한 것이다.

반면, 암호화폐가 선거에 이용되는 것에 대한 유권자들의 불안감도 이번 조사에서 확인됐다. 응답자의 60%는 암호화폐를 통한 정치 후원금 기부가 미국의 선거에서 외국의 개입을 증가시킬 우려가 있다고 답했다. 또한 62%는 암호화폐 후원금이 미국의 정치 시스템에서 불법적인 활동을 증가시킬 가능성이 있다는 의견을 냈다.

유권자들의 긍정적인 시각과 세계적으로 비트코인 등 암호화페를 이용한 정치인 후원에 관심이 높아지는 것과 반대로 캘리포니아주에서는 지난해 선거를 앞두고 선거 후보자의 암호화폐 후원금 모금을 금지하는 결정이 내려졌다.

캘리포니아주 정부의 선거 감독을 담당하는 비당파적 기구 공정정치집행위원회(Fair Political Practices Commission)는 암호화폐를 이용한 정치 후원금 모금이 불법이라는 결정을 했다. 위원들은 암호화폐를 이용한 후원금의 자금 출처와 정치적 투명성 등에 대한 우려 때문에 암호화폐 후원금 금지에 찬성했다고 밝혔다.

위원회는 암호화폐 후원금을 전면 금지하는 방안부터 암호화폐 자금을 전액 현금으로 교환해 은행을 거쳐 후원하는 방안까지 몇 가지를 검토한 후 전면 금지 쪽으로 방향을 정했다. 그런데 이 결정은 지난 2014년 미 연방선거위원회가 선거운동과 정당의 정치행동위원회(PAC)에 대한 현물 기부로서 암호화폐 후원금을 인정한 것과 배치되는 것이어서 정치권의 논란을 가중시켰다.

이런 가운데 202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의 예비후보 중 한명인 앤드류 양이 암호화폐 정치 후원금 본격화에 앞장서고 있다. 대만계 미국인이며, 특히 비트코인 지지자로 알려진 그는 대선 예비주자 선거운동의 일환으로 비트코인 규제에 대해 “기업과 개인이 규제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그 분야에 투자하고 혁신할 수 있도록 디지털 자산 세계에서 명확한 가이드라인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양은 이미 비트코인과 암호화폐로 정치 후원금을 받을 수 있는 플랫폼을 구축하기도 했다.

이와 함께 앤드류 양을 지지하는 휴머니티 포워드 펀드(Humanity FWD)라는 이름의 정치행동위원회(PAC)는 ‘21세기 비트코인’ 이라는 이름의 비트코인 기금 프로그램을 시작해 비트코인 기부를 받고 있다. 휴머니티 FWD의 설립자인 세스 코헨은 단체가 제휴한 비트코인 결제 프로세서 오픈노드(OpenNode)를 통해 비트코인 기부를 받으면 신용카드를 통한 기부와는 달리 거래 수수료를 낮출 수 있다고 암호화폐 정치후원의 장점을 밝혔다.

한편 코헨은 휴머니티 FWD가 기부 받은 비트코인을 즉시 미 달러화로 환전할 것인지, 아니면 비트코인 기부 프로그램이 끝날 때까지 보유할 것인지 아직 결정하지 않았다고 밝혀 비트코인 기부금 관리가 간단한 문제가 아님을 시사했다. 또한 그는 비트코인의 변동성이 각 기부마다 비트코인의 가격 변동을 기록해야 하는 등 추가적인 규제 문제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암호화폐 정치 후원금 제도의 정착까지는 법적인 문제 등 갈 길이 아직 멀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