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록미디어 오수환 기자] 미국이 중국을 비롯한 주요국에 고율의 관세 부과를 예고하면서 글로벌 무역 질서에 다시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관세장벽은 단순한 가격 인상에 그치지 않는다. 관세 장벽은 실물 교역뿐 아니라 금융 결제 시스템 전반에까지 영향을 준다. 특히 기존 국제 결제망은 정치적 변수에 취약하다는 점이 부각되면서, 블록체인 기반의 스테이블코인이 새로운 결제 인프라로 떠오르고 있다.
24일(현지시각)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대중국 관세 인하는 중국의 행동에 달려 있다”며 “향후 2~3주 안에 중국에 대한 관세율을 정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런 발언은 단기적으로 무역 불확실성을 키우는 동시에 중장기적으로는 결제 시스템의 대안을 고민하게 만든다.
기존 무역 결제는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와 복잡한 중개 절차에 의존해왔다. △ 거래 지연 △ 환전 리스크 △ 높은 수수료 등 구조적 한계가 많다. 지정학적 리스크에도 민감하다. 미국발 관세 압박은 이러한 약점을 극명하게 드러냈다.
국제무역 전략 전문가인 사이먼 이버넷 국제경영개발연구소(IMD) 교수는 지난 2일 유럽경제정책연구센터(CEPR) 기고에서 “최근 미국의 관세 조치는 글로벌 무역 환경에 지각변동을 일으키며 수십 년간 쌓아온 경제 통합을 무너뜨릴 위험이 있다”며 “관세 정책이 기업의 인센티브 구조와 국제 비즈니스의 예측 가능성을 전반적으로 흔들고 있다”고 경고했다.
스테이블코인, 제도권 결제 시스템의 대안으로 부상
고조되는 지정학적 불확실성은 무역뿐 아니라 금융 결제 시스템 전반에 대한 회의로 이어지고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주목받는 것이 스테이블코인이다. 스테이블코인은 지정학적 리스크를 덜 받는 ‘비국가형 인프라’로 거래 속도와 비용 면에서도 기존 스위프트(SWIFT)보다 빠르고 비용도 낮다.
서병윤 DSRV랩스 미래금융연구소장은 지난 23일 열린 ‘스테이블코인의 역습: 금융질서의 재설계’ 컨퍼런스에서 “스테이블코인은 비트코인이 제시한 가능성을 실제 시장에서 구현한 도구”라며 “블록체인 기술이 금융 영역에서 현실적으로 작동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 사례”라고 말했다.
이처럼 실용성과 확장성을 갖춘 스테이블코인은 점차 현실적인 선택지로 작용하고 있다. 정치적 제약이 크거나 외환이 불안정한 국가, 글로벌 거래 환경에 노출된 기업들이 빠르게 채택하고 있다.
사미르 케르바지 해시덱스 최고투자책임자(CIO)는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 지역에서 테더(USDT), 서클(USDC) 같은 스테이블코인이 실제 무역 결제에 사용되고 있다”며 “스테이블코인은 기존 금융망을 우회하는 결제 수단으로 빠르게 자리잡고 있다”고 밝혔다.
스테이블코인이 대안적 결제 인프라로 주목 받자 각국도 정책에 활용하고자 한다. 미국은 민간 주도 스테이블코인의 효율성과 확장성에 주목하고 있다.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에는 금융 자유 침해와 정부 통제 강화 가능성을 이유로 들며 신중한 입장을 나타냈지만, 민간 주도 스테이블코인에는 상대적으로 우호적이다. 그는 결제 효율성과 민간 친화성, 유통의 확장성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김병준 디스프레드 연구원은 “스테이블코인은 미국 국채 수요를 창출하는 효과적인 도구”라며 “CBDC보다 설득력 있는 대안”이라고 평가했다.
스테이블코인은 여전히 제도적 장벽에 직면해 있다.
효봉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는 “스위프트에서 특정 국가를 배제하려면 다수 회원국의 동의가 필요해 현실적으로 어렵다”며 “결제망 자체가 정치적 무기로 곧바로 전환되긴 쉽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나 비공식 영역에서는 스테이블코인의 사용이 확산되고 있다. 김효봉 변호사는 “개인 간 지갑 송금은 실시간 추적이 어렵다”며 “외화 유출을 엄격히 통제하는 중국 같은 국가에서는 스테이블코인을 통한 대체 결제가 일어날 수 있다”고 언급했다.
주요국, 스테이블코인 법제화 ‘속도전’… 규제 정비 나선다
미국은 ‘지니어스(GENIUS) 액트’ 법안을 통해 스테이블코인을 제도권에 편입하려 하고 있다. 해당 법안은 미국 국채 100% 담보, 연방 기관 감독이 핵심 내용이다.
미국의 이런 움직임은 다른 주요국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스테이블코인을 제도 밖에서 활용하려는 흐름이 확산되자, 각국 정부 역시 이를 무시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인 것이다.
일본은 자금결제법 개정을 통해 지난 2023년부터 은행·신탁회사·자금이체업자 등에게 스테이블코인 발행을 허용하며 환매 보장과 준비금 운용 요건이 명문화됐다. 이를 기반으로 미즈호, 미쓰비시UFJ금융그룹(MUFG), 스미토모 등 주요 금융 그룹은 스테이블코인 결제 시스템 구축에 속도를 내고 있다.
싱가포르는 금융 허브로서의 입지를 반영해 가장 유연한 규제 모델을 구축하고 있다. 싱가포르 통화청은 ‘스테이블코인 발행 서비스’ 라이선스를 신설하고, 명목가치 대비 100% 이상의 준비금 보유를 의무화하는 동시에 외화 스테이블코인 발행도 허용하고 있다. 준비자산의 외국 수탁기관 보관 역시 인정되는 등 신뢰성과 유연성을 동시에 추구하는 정책 모델을 보여주고 있다.
한서희 법무법인 바른 변호사는 “미국, 일본, 싱가포르처럼 주요국들이 스테이블코인을 제도권 안으로 빠르게 끌어들이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도 더 이상 논의를 늦출 여유가 없다”며 “법적 지위와 발행 주체 요건, 준비금 기준 등을 조속히 마련하지 않으면 산업 경쟁력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고 말했다.
한국, 글로벌 결제 경쟁 속 대응 시급
글로벌 법제화 흐름이 가속화되는 가운데 전문가들은 한국도 원화 기반 스테이블코인 도입을 위한 구체적 제도 설계가 시급하다고 지적한다.
김효봉 변호사는 “한국에서 원화 기반 스테이블코인이 제대로 기능하려면 발행기관의 안정성과 국제 유통 가능성이라는 두 측면에서 제도 정비가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스테이블코인을 아무 기관에서나 발행하게 둘 경우 자산 운용의 불투명성과 리스크가 커질 수 있다”며 “금융기관 등 자금력과 통제력을 갖춘 주체에 한해 발행 권한을 부여하고 준비자산은 제3의 수탁기관에 분리 보관해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그는 “핀테크 기업이나 거래소가 해외 플랫폼과 협업할 수 있도록 국제 유통을 위한 제도적 장벽을 완화해야 한다”며 “원화 기반 스테이블코인이 글로벌 결제망에 실질적으로 통합될 수 있는 기반 조성이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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