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 가득한 봄날, 나물 파티에 초대받아
가져간 쇼비뇽블랑, 쓴 나물에 고전하다
수제 햄과 나물 곁드니 활짝 피어나
[블록미디어 권은중 전문기자] 봄이 한창이다. 아름답다. 화사한 날씨만큼 봄은 와인을 마시기에도 좋은 계절이다. 서양에서도 우리나라처럼 봄나물을 즐긴다. 대표적인 것이 아스파라거스다. 이 아스파라거스를 봄이 제철인 치즈와 함께 먹는다.
그렇지만 우리나라의 봄나물에 견줄 바는 아니다. 우리나라는 봄나물 천국이다. 봄에는 냉이와 달래부터 시작해서 온갖 나물이 쏟아진다. 며칠 전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지인으로부터 봄나물 파티에 초대 받았다. 봄나물과 돼지 머리고기 편육이 있으니 와인과 함께 마시자는 거였다. 상큼한 제안이었다.
나는 서울 연희동에서 신혼생활을 했다. 그래서 연희동은 나에게는 출발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당시 연희동의 사러가 쇼핑센터 뒤편 빌라에서 살았는데 레스토랑은 바로 그 근처에 있었다. 그래서 연희동은 나에게는 봄처럼 새록새록한 정감이 있는 곳이다.
처음에는 샴페인을 가져가려고 했는데 이날은 날씨가 더웠다. 샴페인을 가져가면 칠링을 해야 하고 아마 음식이 나올 때 최적의 상태가 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나는 대안으로 뉴질랜드 생클레어 쇼비뇽 블랑을 골랐다. 차가운 뉴질랜드 말보로우 쇼비뇽 블랑이 화창한 봄 날씨에 딱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쇼비뇽 블랑은 고추장이나 된장 양념과도 잘 어울린다.
꽃과 초 그리고 예쁜 그릇으로 장식돼 있는 연희동 식당은 작고 예뻤다. 음식으로는 샌드위치와 나물과 장아찌 주먹밥을 팔고 있는 일종의 팝업 스토어였다. 하지만 지인은 이날 특별히 두릅, 엄나무순, 화살나무순, 머위잎과 당귀를 준비했다. 나물은 계절의 에너지를 담고 있어 맛있었다.
그런데 당귀를 제외하고는 쓴맛이 나는 나물이었다. 뉴질랜드 쇼비뇽 블랑은 이 쓴맛에 잘 대응하지 못했다. 리슬링이 아쉬운 순간이었다. 리슬링은 당도가 있어서 이런 쓴맛을 잘 잡아주기 때문이었다. 화창한 봄 날씨만 떠올렸지 봄나물의 쓴맛을 고민하지 않았던 것이다.
함께 먹은 머리고기 편육은 전주에서 40년간 편육을 만들어온 장인의 요리였다. 쫄깃하고 맛있었다. 두릅과 함께 편육을 초장을 찍어 먹었다. 편육은 두릅과도 잘 어울렸지만 된장에 무친 머위 나물과 더 잘 어울렸다. 리슬링도 아쉬웠지만 처음 가져오려다 놓고 온 로제 샴페인도 아쉬웠다. 샴페인의 산도는 분명히 이 머리고기 편육의 기름기마저 싹 씻어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쇼비뇽 블랑이 아주 영 힘을 못쓴 것은 아니었다. 쇼비뇽 블랑의 실력은 샌드위치 햄인 콜드컷과 여러가지 수제햄을 두릅과 엄나물을 함께 먹는 안주에서 발휘됐다. 나물 파티를 많이 치뤄본 지인의 지혜로운 레시피였다. 햄의 짭짤함 덕분에 고추장을 찍지 않자 와인이 착착 감겨왔다. 내놓았던 햄은 수제햄이었다. 나물도 대부분 경기 양평 지인의 농장에서 손수 따온 것이었다. 정성까지 곁든 안주였다.
나물들은 뉴질랜드 쇼비뇽 블랑 뒤에 딴 이탈리아의 피노 그리지오와도 잘 어울렸다. 햄과 치즈는 레드 와인뿐 아니라 화이트도 잘 어울리는데 쇼비뇽 블랑이나 피노 그리지오처럼 바다감이 약한 화이트와도 매칭이 좋았다. 나물과 사퀴테리가 어울린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이었다. 독특한 한국적 사퀴테리가 가능할 것 같다는 영감이 들었다.
어둑어둑해지자 향초가 켜지고 벚꽃엔딩같은 봄날의 서정을 닮은 노래가 흘러나왔다. 날씨와 와인 그리고 거기에 곁들어지는 수다까지. 모든 것이 만족스러운 봄날이었다.
* 권은중 전문기자는 기자로 20여 년 일하다 50세에 이탈리아 북부 피에몬테의 ‘외국인을 위한 이탈리아 요리학교(ICIF)’에 유학을 다녀왔다. 귀국 후 , 등에 음식과 와인 칼럼을 써왔고, 관련 강연을 해왔다. 『와인은 참치 마요』, 『파스타에서 이탈리아를 맛보다』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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