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메타 연구소 최창환 소장]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비트코인 창시자인 사토시 나카모토의 동상이 세워졌다.

비트코인 지지자 한 명이 가면을 쓰고 사토시의 동상을 바라보고 있다.

이 가면이 혁명과 저항의 아이콘인 가이포크스 가면이다. 영화 ‘브이 포 벤데타(복수)’의 주인공 브이가 썼던 가면이다.

묘하게 닮았다. 사토시의 얼굴에 가면은 한 개가 아니라 여러 개로 반사된다.

“우리 모두가 사토시다”라는 비트코인 지지자들의 정신과 통하는 듯 하다.

혼자서 거대 권력에 맞서 싸웠고 승리를 목전에 두고 쓰러진 브이.

금융 권력에 맞서는 비트코인을 내놓고 숭리를 위해 사라진 사토시.

브이와 사토시는 곰곰히 살펴보면 통하는 게 많다.

비트코인은 한마디로 정부나 중앙은행이 없는 개인 간의 화폐다. 이 생각 자체가 혁명이다.

많은 사람들은 투자의 수단으로 비트코인을 생각한다. 그러나 시작은 재산이나 투자 수단이 아니라 개인의 자유다.

조금 엉뚱할 수 있다. 독재에 저항한 브이와 근본 없는 화폐를 만든 사토시가 어떻게 같을 수 있는가? 당연한 의문이다. 영화 줄거리부터 살펴보자.

다음은 영화 줄거리.

2034년, 대영제국은 극우 노스파이어 정권이 지배하는 전체주의 국가다.

방송국에 근무하는 이비는 비밀경찰에게 강간당할 상황에서 마스크를 쓴 브이에게 구출된다.

브이는 테러리스트다. 정보조작과 공포로 국민들을 지배하는 독재정권을 붕괴시키려고 노력한다.

독재정권은 조작으로 탄생했다. 비밀경찰은 그들이 만든 바이러스로 테러를 조작해 영국 국민 8000명을 희생시킨다. 이를 이용해 노스파이어는 ‘테러와의 전쟁’을 명분으로 국민 다수의 지지를 획득한다. 국가체제를 전체주의로 전환하는데 성공한다.

브이는 강제 수용소에 이들이 만든 바이러스로 생체 실험을 당했다. 그러나 총알을 맞아도 죽지 않는 불사신의 몸으로 재탄생한다.

브이는 최후의 결전을 선언한다. 두려움과 공포에 떨던 이비는 체포돼 브이의 거처를 추궁 당했으나 죽음을 무릅쓰고 비일을 지키는 강한 전사로 변신한다.

브이는 영국 국회의사당을 파괴하겠다고 예고하고 가이포크스 가면을 시민들에게 보낸다.

1605년 제임스 1세에게 불만을 품은 가톨릭 교도들이 웨스트민스터 궁전 지하에 화약을 쌓아놓고 폭파시키려고 했다. 이때 주동자가 가이포크스였다. 그의 가면은 테러리스트의 상징으로 희화화 됐으나 브이 포 벤데타 이후 혁명과 저항의 상징으로 자리잡았다.

가면을 쓰고 놀던 어린 아이가 비밀 경찰의 총에 맞아 죽는다. 시민들은 폭발한다.

폭발이 예고된 11월 5일. 브이는 지하철에 폭탄을 가득 싣고 거사를 준비한다. 이에 앞서 비밀경찰과 노스파이어를 제거한다. 지하에서 만나 그들의 총탄을 뚫고 모두를 죽인다. 아무리 강한 몸으로 재탄생했어도 수 백 수 천 발의 총탄은 그를 더 이상 지탱하지 못하게 한다.

브이는 거사 장소에 와서 폭발할지 여부를 이비가 결정토록 한다. 이비는 그의 시체를 폭발물이 있는 기차에 태우고 의사당을 향해 출발시킨다.

그 시간 런던 시민들은 모두가 브이다. 브이가 보내준 가면을 쓰고 수 천 수 만 명이 의사당을 향해 행진한다.

경찰이 가면을 쓴 아이를 죽였지만, 중화기로 무장하고 다가오면 쏘겠다고 위협하지만, 정의를 향한 분노가 공포를 뛰어넘은 런던 시민들은 “우리가 브이다”면서 행진을 계속한다.

의사당은 폭발한다. 두려움을 극복하고 싸움에 나선 이비도, 런던 시민들도 자유인으로 재탄생 하는 순간이다.

사토시와 브이의 닮은 점

브이 혼자 싸움을 이긴 게 아니라 두려움을 극복한 참여를 통해 런던 시민들이 자유인이 된 것이다.

“우리 모두가 사토시다”는 여기서 따온 구절이다. 브이 포 벤데타 처럼 비트코인 혁명도 개인들의 참여가 있어야 성공할 수 있다는 의미다.

혁명의 성공을 보지 못하고 쓰러진 브이처럼 비트코인 혁명의 성공을 위해 사토시는 스스로 사라졌다.

사토시와 함께 비트코인을 만든 이들은 크립토펑크라고 불린다. 암호를 이용해 사이버 세상에서 정부와 기업 권력의 감시에서 벗어나자는 운동이다. 모든 것을 감시하는 조지 오웰의 1984가 꼭 남의 일만은 아니다.

정부와 기업 등 권력자들은 항상 개인의 자유와 존엄성을 해칠 위험이 있다.

테러를 조작해 전체주의를 만드는 파시스트는 아니라도 집단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자유를 희생시키는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또 정치 세력이나 관료들이 집단의 이익이라는 명분으로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관철시킬 수도 있다.

그들이 비트코인이라는 암호화폐를 자유를 지키는 수단으로 선택한 이유는 바로 정부가 제공한 것이다.

2008년 미국 금융위기가 그 단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금융기관이 부실해 지자 미국은 수 조 달러의 구제금융을 실행했다. 돈을 마구 찍어낸 것이다. 그 폐해는 미국 안에서는 빈부격차의 확대로 나타났다.

월가를 점령하라는 시위가 벌어졌다. 돈으로 자산가치를 불리고 빈부격차를 키우는 기존의 금융 시스템과 경제운용방식으로는 더 이상 사회가 지속 가능할 수 없다는 사실이 증명됐다. 돈 풀기는 아직도 지속되고 있다.

금융불균형이라는 모호한 단어로 표현되는 현상은 돈 찍기로 커진 거품이 부익부 빈익빈을 만들고 거품 붕괴로 공동체마저 붕괴에 직면했다는 얘기를 어렵게 표현한 것이다.

전 세계적인 현상이다. 한나라만 돈을 풀면 환율이 변동해 다른 나라가 무역에서 손해를 본다. 서로 경쟁적으로 풀지 않을 수 없는 구조다.

미국이 잘못 했는데 달러화 환율이 치솟아 제 3세계가 고생하는 이상 현상도 2008년 금융위기 때 나타났다.

원로 여배우 나문희씨의 대사가 생각난다.

병원 검사를 거절하고 일하러 가야 한다는 그녀에게 의사는 “그러다 죽을 수 있습니다”라고 경고한다.

그녀는 “사람들이 뭐 때문에 가장 많이 죽는지 아니?” “가난 때문이야. 가난 때문에 병원도 못가고 무리하고 그래서 죽는 거야”라고 말했다.

경제적 자유 없이는 진정한 자유는 있을 수 없다. 지금 시스템은 가난을 확대 재생산하고 사람들의 자유를 조금씩 앗아가고 있다.

물가 상승과 자산 가격 상승이 그것이다. 같은 월급을 받아도 생활은 점점 힘들어 진다.

비트코인은 그 이유를 통제되지 않는 정부와 중앙은행의 화폐 발행에서 봤다.

비트코인의 출발이 자유인 이유다. 검열과 통제로부터의 자유. 경제적 자유.

브이의 주장은 현 시대가 영화 속의 영국과 닮은 부문이 적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국민이 정부를 두려워 하는 게 아니라 정부가 국민을 두려워 해야 한다”

우리는 어떤 세상에 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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