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록미디어 James Jung 기자] 돈을 발명한 사람이 있습니다. 미국 역사에서는 살먼 P 체이스가 그런 인물인데요. 체이스는 사실상 달러를 발명한 사람입니다.
달러의 별명 중 하나가 그린백(Greenback)인데요. 뒷면이 녹색이라는 뜻인데. 체이스가 발명한 달러가 바로 그린백입니다.
남북전쟁과 미국 연방정부 위기
남북전쟁(1861~1865)이 발발했습니다. 노예제 폐지를 내세운 북부(연방)와 이에 반대한 남부(연합)가 내전을 시작했습니다. 공화당의 링컨 대통령이 이끄는 연방 정부는 막대한 전비를 부담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미국 정부가 보유 중인 금·은 보유고는 빠르게 고갈되고 있었습니다. 국채 발행 등 전통적 재정 조달 수단도 한계에 봉착했습니다. 연방 정부는 심각한 재정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이 문제를 푼 인물이 있습니다.
달러의 탄생
당시 재무장관이었던 체이스는 금이나 은으로 태환되지 않는 지폐를 발행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돈의 가치를 금 또는 은으로 보장하는 것이 당시에는 일반적이었는데요. 정부가 보유한 금과 은이 고갈되자, 그냥 종이 돈을 찍자고 한 겁니다.
당시로써는 파격적인 이 아이디어는 1862년 2월 미 의회를 통과한 법화법(Legal Tender Act)에 의거해서 실행에 옮겨집니다. 1.5억 달러 규모의 미국 역사상 최초 법정불환지폐가 세상에 나오게 됩니다.
이 지폐들은 뒷면을 녹색 잉크로 인쇄했는데요. 그린백이라는 말이 여기서 유래합니다. 기존에 금·은 등 실물로 보장되던 화폐와 달리 정부의 신용만을 바탕한 돈입니다.
그린백에는 법정통화 지위가 부여되었는데요. 이는 연방 정부가 고갈된 금속 통화 없이도 군인 봉급과 전쟁 물자 대금을 지급하고 전비를 조달할 수 있게 만든 획기적인 조치였습니다.
당대의 반응과 논란
“이게 돈이야?” 미국인들은 처음 등장한 종이 화폐를 쉽게 신뢰하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종잇조각이 금화나 은화와 동일한 가치를 지닌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습니다. 가급적 그린백을 받는 즉시 금속 주화로 바꾸려했습니다.
금융업계와 보수적 경제 전문가들은 담보 없는 지폐 남발이 경제 파탄을 가져올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실제로 법화법 통과 당시 다수의 은행가들은 정부 지폐에 대한 신뢰 부족으로 경제에 치명적 타격이 불가피하다고 경고했습니다.
의회 내에서도 화폐 체제 붕괴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컸습니다. 야당인 민주당은 그린백 발행을 정부의 도덕적 타락으로 규탄했습니다. 1863~64년 인플레이션으로 물가가 급등하자 민주당은 그린백을 향락과 부패와 동의어라며 공화당을 공격했습니다.
심지어 일부 반대파는 노예해방을 추진하던 공화당을 조롱하기 위해 그린백을 “폐지주의자의 누더기(abolition rags)”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헌법적 쟁점
연방 정부의 불환지폐 발행 권한에 대한 위헌 논란도 거셌습니다. 남북전쟁 중 긴급 조치로 시행되긴 했으나, 금이나 은 없이 종이돈에 법정통화 효력을 부여하는 것이 헌법상 허용되는지 의문이 제기된건데요.
이러한 논쟁은 결국 전쟁 후 연방 대법원으로까지 이어져, 1870년 대법원은 그린백 법정통화 조항이 “헌법에 위배된다”는 첫 판결을 내렸습니다.
남북전쟁 후 연방 대법원이 그린백 발행이 위헌이라고 결정을 내릴 때, 대법원장은 누구였을까요? 그린백 아이디어를 낸 체이스 본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듬해 그랜트 대통령의 새로운 대법관 임명 후 1871년 재심에서 해당 판결은 5대4로 뒤집혔고, 전시의 합법적 긴급조치로서 그린백의 법정통화 발행이 합헌임이 최종 확정되었습니다.
미국 금융 시스템의 변화
그린백의 발행으로 북부 정부의 재정 압박이 상당 부분 해소될 수 있었습니다. 1862년 이후 남북전쟁이 끝날 때까지 정부는 누적 약 4.5억~5억 달러 상당의 그린백 지폐를 찍어냈습니다. 이는 남북전쟁 전체 북군 경비의 약 15%를 충당한 규모였습니다.
그린백을 통한 유동성 공급은 전시 북부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어, 정부가 적시에 비용을 지불하고 상거래를 유지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그러나 부작용도 있었습니다. 통화량 급증으로 인플레이션이 나타난 것인데요. 그린백 남발에 따라 물가가 급등해 북부의 연간 인플레이션율이 1862년에 약 14%, 1863~1864년에는 25%에 달했습니다.
급격한 물가 상승을 억제하기 위해 링컨 행정부와 의회는 미국 최초의 소득세 도입과 주류·담배 등에 대한 소비세 인상 등의 조치를 병행했습니다.
체이스 재무장관은 미국의 금융·통화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재편했습니다. 그린백의 도입으로 연방 차원의 단일 통화가 처음으로 등장한 것인데요. 1863~64년에 제정된 전국은행법(National Banking Acts)과 맞물려 전후 미국은 중앙집권적 국가 통화 체제로 전환되었습니다.
남북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미국에는 1600여 개에 달하는 주(州)은행들이 난립하며 수천 종 이상의 은행권이 유통되는 화폐 혼란이 있었습니다. 전쟁 후에는 연방 정부가 발행하고 보증하는 지폐로 통일되어 화폐의 신용과 안정성이 향상되었습니다.
연방 차원의 국립은행들도 전국적으로 설립되어 분열돼 있던 금융 시스템을 통합하는 역할을 했는데, 이 모든 변화는 체이스가 남긴 중요한 유산입니다.
금본위와 그린백
그린백 발행이 촉발한 통화에 대한 논쟁은 전쟁 이후에도 오랫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전후 미국 정계에서는 금본위로의 복귀 여부와 통화 팽창 문제를 둘러싸고 그린백파(Greenbackers)와 금화주의자(Goldbugs) 간의 갈등이 수십년간 지속되었습니다.
1879년 연방 정부가 금 태환(달러 가치를 금으로 보장)을 재개한 후에도 이러한 “화폐 문제” 논쟁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는데요. 결국 그린백으로 상징되는 정부의 화폐 발행권은 되돌릴 수 없는 변화로 남았습니다. 이후 미국 금융체제는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중앙은행 체제로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1971년 닉슨 대통령은 달러의 금 태환을 중단하는 조치를 내립니다. 달러는 다시 그린백이 되었습니다. 그 이후 달러는 ‘현재까지는’ 세계 최고의 돈 지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체이스의 생애
달러를 발명한 살먼 포틀랜드 체이스(Salmon P. Chase, 1808~1873)는 노예제 반대 운동의 지도자이자 오하이오 정치인이다.
남북전쟁 시기 링컨 행정부의 재무장관으로 그린백(불환지폐)·국가은행 제도를 도입하며 전쟁 자금을 조달했다. 이후 미국 연방대법원장으로 임명돼 재건기의 핵심 판례와 앤드루 존슨 탄핵 재판을 주재했다.
그의 초상은 1918~1946년 발행된 1만 달러 지폐에 사용됐고, 체이스 맨해튼 은행(Chase Manhattan Bank 현 JPMorganChase)의 이름은 그를 기려 붙여졌다. JP모건체이스와 경제적 재무적 관계는 없다.
체이스는 달러 동전 디자인에도 관여해 1864년 2센트 주화에 “In God We Trust(신을 믿습니다)” 문구를 처음 새겨넣었다.
흑인 시민권 확대에 우호적이었고, 대법원 공직에 있으면서도 1868·1872년 민주당·자유공화당 대선 후보 지명을 노렸으나 실패했다.
1860년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링컨과 경합했으나 낙마했고, 대법원장 재임 중에도 백악관 입성을 포기하지 않았다.
1873년 5월 7일 뉴욕에서 뇌졸중으로 사망, 신시내티 스프링그로브 묘지에 안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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