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서 어렵게 공수했던 추억 담긴
깔롱 세귀르, 편의점 앱으로 구매해
앱 와인구매, 편리하고 할인돼
[블록미디어 권은중 전문기자] 내가 레드와인을 잘 안 마시던 시절인 2005년쯤 일본 도쿄로 출장을 갔었다. 그런데 거긴 와인의 신세계였다. 와인이 한국의 절반가였다. 일본은 와인의 가격이 아니라 양에 세금이 부과된다(종량제). 반면 한국은 수입 가격에 따라 주세가 매겨진다(종가제). 그래서 일본은 고급 와인의 가격이 국내 가격에 견줘 상당히 저렴하다.
내가 2019년 이탈리아에서 맛있는 와인을 마셔보기 전까지 레드와인을 즐기지 않던 이유는 아주 단순했다. 가성비가 낮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마신 레드 와인 가운데 제대로 자신의 퍼포먼스를 보여준 레드 와인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레드에 그렇게 삐딱했던 나에게 일본 와인가격은 매우 합리적으로 보였다. 그래서 나는 그때 와인을 좋아하는 대학 동창에게 국제전화를 했다. 일본에 프랑스 와인이 무척 싼데 혹시 필요한 와인이 있으면 내가 대신 사주겠다고 말했다. 그 때 친구가 찍어준 와인이 샤또 깔롱 세귀르(Chateau Calon Segur)였다.
발렌타인 와인, 깔롱 세귀르
나도 알고 있던 와인이었다. 에티켓에 하트가 그려져 있고 초콜릿 맛이 나서 발렌타인데이 와인으로 쓰인다 것쯤은 알고 있었다. 에티켓에 하트가 그려진 것은 루이 15세에게 ‘와인의 왕자’라는 칭호를 받던 세귀르 후작(Marquis de Segur)을 후손들이 기리면서다. 세귀르 후작은 프랑스 보르도에서 가장 훌륭한 와인을 생산하는 샤또 라피트, 샤또 라뚜르같은 포도밭을 소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세귀르 후작은 “내가 샤또 라피트와 라뚜르에서 와인을 만들지만 내 마음은 깔롱에 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깔롱은 그의 아내가 세귀르 후작과 결혼을 하면서 가져온 포도밭이었다. 그의 말은 아내를 사랑한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래서 후손들은 세귀르 후작의 애틋한 마음을 기리기 위해 와인 라벨에 하트를 그렸다. 이후 깔롱 세귀르는 보르도 그랑퀴리 3등급으로, 샤또 라피트와 라뚜르는 1등급으로 지정됐다.
이런 스토리에 견줘 깔롱 세귀르는 일본에서 저렴했다. 당시 우리나라 돈으로 6만원쯤이었다. 나는 일본에서 구매한 ‘칼롱 세귀르 1998’을 친구에게 5만원을 받고 넘겼다. 그리고 잊고 있었다. 그만큼 나는 레드와인에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이 친구가 이 와인을 가지고 우리집에 왔다. 같이 마시자는 것이었다. 내가 사왔으니까 나랑 같이 먹겠다는 기특한 생각을 했다고 한다. 레드 와인이 거기서 거기지라는 심정으로 정말 별 기대없이 뚜껑을 땄다. 나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근사한 향기가 났다. 꽃향에 초콜릿향에…. 한번도 맡아본 적이 없는 영혼을 울릴 법한 향기가 와인에서 나는 것이었다.
우리는 이 진한 향기에 이끌려 브리딩이고 디캔팅이고 할 생각 없이 와인을 마시기 시작했다. 농밀하고 진한 향에. 그리고 마지막에는 초콜릿 향이 밀려왔다. 뭔가 MSG를 첨가한 것 아닐까라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이 와인에 이어 마신 이탈리아 와인도 가격이 6만원쯤 했는데 아무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만큼 깔롱 세귀르의 맛과 향은 압도적이었다.
그래서 이날 이후 친구나 나나 깔롱 세귀르를 한국에서도 사서 마셔봤다. 당시 한국에서는 12만~13만원쯤 했다. 2배의 가격이었다. 그런데 하나같이 일본에서 사왔던 그 와인의 맛이 나지 않았다. 와인을 잘 아는 전문가에게 물어보니 숙성이 최상급으로 잘된 와인은 유럽과 미국 그리고 일본에서 우선 소비된다는 것이었다. 잘 익은 와인은 와인 선진국으로 갈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였다. 그럴 듯 했다. 일본에서 마셨던 레드 와인은 대부분 퍼포먼스가 꽤 좋았기 때문이었다. 그 이후 나는 국내에서 깔롱 세귀르를 찾아 마시는 일은 없었다. 또 최고급의 레드 와인은 한국에서 구매하기보다 외국에 나가서 마시는 게 합리적 소비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새로운 와인 구매루트, 편의점앱
그런데 최근 휴대폰에 깔린 GS25 편의점 앱을 뒤지다가 GS25몰에서 깔롱 세귀르를 파는 것을 발견했다. 물론 팔고 있는 것은 깔롱 세귀르의 세컨드 와인(세컨드 와인은 같은 포도밭에서 나온 포도를 가지고 만든 와인으로, 품질 면에서는 특급 와인에 미치지 못하나 특급 와인의 맛과 향기를 느낄 수 있다)인 르 마르퀴스 드 깔롱 세귀르 2022였다. 이 와인의 가격은 20년전 내가 일본에서 샀던 가격과 비슷한 8만원대였다. 깔롱 세귀르 퍼스트는 현재 30만원을 훌쩍 넘는다. 와인을 한 살이라도 어릴 때 시작해야 하는 이유다.
세컨드 와인이고 2022년 영한 빈티지만 한번 주문해봤다. 깔롱 세귀르의 강렬한 추억을 떠올려줄 수 있을지 궁금했다. 무엇보다 간편한 구매 방식이 맘에 들었다. 앱으로 주문하면 1주일쯤 있다가 동네 편의점에 가서 픽업을 해오면 되는 시스템이었다. 일본에 가서 와인숍을 들러 애지중지 패키지를 해서 비행기를 타고왔던 과거의 내가 석기시대 사람처럼 느껴졌다.
비록 세컨드 와인이긴 하지만 나는 20년 전에 칼롱 세귀르를 같이 먹었던 친구들을 집으로 불렀다. 2005년 어느 가을날 마셨던 깔롱 세귀르 1998의 기적을 기대하면서 말이다. 물론 이 세컨드 와인에 로버트 파커 93점, 제임스 서클링 94점 등이 높은 점수를 준 것을 알고 나름의 기대감도 가졌다.
하지만 르 마르퀴스 드 깔롱 세귀르는 진한 향에 단단한 구조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우리가 20년 전에 경험했던 그 놀라운 향은 없었다. 비강에 잔잔하게 퍼지는 초콜릿향도 없었다. 균형감도 좋고 중간 정도의 탄닌감도 나쁘지 않았지만 뭔가 특색이 없었다. 우리는 시간을 두고 마셨지만 2~3시간 뒤에도 체리나 베리 향이 좀더 살짝 살아났지만 임팩트 있는 향은 피어나지 않았다.
우리의 기대수준이 너무 높았던 탓도 있을 것이다. 깔롱 세귀르 퍼스트를 마시지 않았다면 이 세컨드 와인도 우리는 분명 매력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와인은 3분의 2는 18개월 오크통에 숙성하고 3분의 1은 숙성하지 않은 새로운 와인을 섞는 방식으로 만든다. 병을 개봉했을 때 바로 마실 수 있는 발랄함을 느낄 수 있기 위해 배려한 것인데 이게 약점으로 작용했다.
그래도 나는 긍정하기로 했다. 먼저 추억이 깃든 와인을 편리하게 스마트폰과 편의점을 통해 구매했다는 점에 높은 점수를 줬다. 나는 이 레드 와인 말고도 내가 가장 맛있게 먹었던 프랑스 부르고뉴의 레드 와인인 루이 자도(Louis Jadot)의 쥬브레-샹베르땡( Gevrey-Chambertin)도 이마트 앱을 이미 주문했다. 맘에 드는 것은 앱을 통해 사면 10%를 할인해준다. 2005년 깔롱 세귀르 퍼스트와 얼마전 세컨드를 함께 마셨던 친구들과도 또 약속을 잡았다. 비행기 타고 외국을 가지 않아도 스마트폰으로 효과적으로 새로운 추억거리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 권은중 전문기자는 기자로 20여 년 일하다 50세에 이탈리아 북부 피에몬테의 ‘외국인을 위한 이탈리아 요리학교(ICIF)’에 유학을 다녀왔다. 귀국 후 , 등에 음식과 와인 칼럼을 써왔고, 관련 강연을 해왔다. 『와인은 참치 마요』, 『파스타에서 이탈리아를 맛보다』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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