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록미디어 이건우 객원기자] “우리나라는 바야흐로 중화학공업 시대에 들어섰습니다. 정부는 이제부터 중화학 육성 시책에 중점을 두는 중화학공업화 정책을 선언하는 바입니다.”

73년 1월 12일 연두기자회견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단호한 목소리로 “중화학공업화 선언”을 발표했다. 80년대 비전으로 제시한 ‘수출 100억달러, 1인당 국민소득 1000달러’ 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기존 경공업 구조에서 벗어나 중화학공업을 적극 육성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반 만년 농업국가에서 벗어나 중후장대형 신흥 공업국가로 경제구조를 확 바꾸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 경공업에서 중공업으로…경제구조 大전환

‘중화학공업화’ 선언의 배경에는 당시 급변하는 국내 경제여건이 주요인으로 작용했다. 70년대 들어서면서 한국 경제는 일대 전환을 요구받고 있었다. 정부의 강력한 수출드라이브 정책에 힘입어 경제성장률은 목표치를 초과하는 실적을 보이고 있었지만 경제체질은 여전히 허약했다.

수출품의 주종은 가발이나 농산품 등 노동집약적 상품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런 저부가가치 상품으로는 더 이상 고도성장을 이끌어 가기 불가능하다는게 정부와 경제계의 판단이었다.

그동안 경제를 지탱해 온 경공업 주도 전략에도 제동이 걸렸다. 말레이시아 태국 등 후발 개도국들이 저가의 경공업 제품을 내세워 대거 추격에 나선 탓이다. 중간재와 자본재 부문의 해외의존도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는 점도 불안요인이었다. 자본재나 소재산업 육성 없이는 항구적인 성장을 기대할 수 없다는 위기감이 경제계 전반에 확산됐다. 대대적인 산업구조 전환 압력에 직면한 것이다.

◆ 또다른 배경…방위산업 육성

박 대통령이 중화학공업화를 선언한 또 다른 배경으로 ‘방위산업 육성’을 빼놓을 수 없다. 당시 한반도를 둘러싼 국내외의 안보환경 변화는 중화학공업화를 촉진하는 기폭제가 됐다.

국내적으로는 68년 1월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기습사건에 이어 미국 정찰선 푸에블로호가 북한에 나포됐고, 11월에는 울진 삼척에 무장공비가 침투하는 등 남북간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다.

국제변수로는 70년 2월 닉슨독트린이 발표됐다. “아시아의 방위는 아시아인이 하라. 미국은 빠지겠다”는게 독트린의 주요 골자였다. 이해 7월 실제 주한미군 7사단이 철수했다.

닉슨독트린은 한국이 방위산업 건설에 본격적으로 나서는 촉매 역할을 하게 된다. 더 이상 미국에 의존하는 안보전략에 안주할 수 없으며, 하루라도 빨리 자주국방 체제로 전환해야 한다는 절박감이 정권 내부에 깊숙히 파고들었다.

70년 7월 박 대통령은 소구경 국산 화기를 생산할 수 있는 자체 공장을 건설하라고 관계부처에 지시를 내렸다. 이 지시에 따라 72년부터 기초화기 시제품이 생산됐지만 성능은 신통치 못했다. 병기 생산에 필요한 정밀 기초기술이 절대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이다.

몇 차례의 시행착오를 거친 박 대통령은 “방위산업은 중화학공업의 기반위에서야 가능하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된다. 73년 중화학공업화 선언은 이 같은 실증적 체험을 통해 나온 것이었다. 중화학공업 육성은 산업구조 고도화라는 ‘경제적 목적’과 방위산업 육성이라는 ‘군사적 목적’이 결합된 복합정책의 산물이었다.

◆ 방위산업은 민간 주도로

중화학공업을 육성키로 하면서 방위산업을 국가주도로 할 것인 지, 민간주도로 추진할 것인 지를 놓고 정부 부처간에 논쟁이 가열됐다. 재무부 기획원 등 경제부처와 청와대 비서실은 민간주도를 선호한 반면 국방부는 국가주도를 주장했다. 국방부는 방위산업 전담 공기업을 세워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최종 결론은 대통령이 내렸다. 박 대통령은 “방위산업을 공기업 형태로 육성하면 수요가 포화상태에 이를 경우 기업의 존립과 생존을 위해 자칫 전쟁 불가피론을 유발할 위험성이 있다”고 지적, ‘민간주도’의 손을 들어줬다.

대통령의 언급 이후 중화학공업 육성은 민간기업이 주도하고, 정부는 정책적으로 뒷받침해주는 체제로 자리를 잡게 된다. 대통령의 중화학공업 육성 선언 이후 정부는 개별산업육성법을 제정하고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를 설치하는 등 본격적인 산업구조 개편에 착수했다.

73년 5월 위원회 산하에 중화학공업추진기획단이 출범하면서 ▲철강 ▲비철금속 ▲기계 ▲석유화확 ▲조선 ▲전자 등 6개 분야를 중화학공업 전략산업으로 선정하고, 업체별로 구체적인 지원에 나서게 된다. 중화학 육성 대상으로 선정된 기업들에게는 내국세와 관세가 감면되고 대출을 포함한 각종 금융지원이 이뤄지는 것은 물론 수입규제를 통한 국내 판매가격 보조 등 정부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지원이 단행됐다.

이 같은 지원에 힘입어 철강분야에서는 포항제철이 2,3,4기 설비확장을 통해 규모를 늘렸고, 비철금속 분야에서는 온산공업단지에 아연제련소와 구리제련소가 건설됐다. 또 석유화학 분야에서는 기존 울산 석유화학단지의 시설 확장에 이어 여천에 제2 석유화학단지가 건설됐으며, 조선분야에서는 현대 울산조선소, 대우 옥포조선소, 삼성 죽도조선소가 건설됐다. 기계공업 분야에서는 창원에 대규모 기계단지가 조성됐고, 전자부문에서는 구미에 전자공업단지가 건설됐다.

정부의 적극적인 중화학공업 육성 시책에 힘입어 우리나라의 산업구조는 급격히 변화하기 시작한다. 76년 “54 대 46″이었던 경공업과 중공업의 비율이 79년에는 “48 대 52″로 바뀌는 등 3년만에 중화학공업 우위로 역전됐다. 특히 61년도 40%에 달했던 1차산업 비중은 80년들어 14.4%로 낮아진 반면 제조업 등 2차산업 비중은 같은 기간 15.2%에서 30.2%로 2배 이상 급상승했다.

전통적 농업국가에서 신흥 공업국가로 바야흐로 탈바꿈하기 시작한 것이다.

◆ 자원배분 왜곡, 경제력집중 등 부작용 양산

박정희 정권의 중화학공업 육성은 그 경제적 타당성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열악한 기술과 자본 수준 등에 비추어 볼 때 힘에 부치는 정책이었다. 무리수를 두다 보니 추진 과정에서 적지 않은 부작용을 양산했다.

첫째, 시장과 가격에 의해서가 아니라 모든 계획이 정부 주도하에 입안되고 집행됐다는 점이다. 투자분야와 규모, 담당기업 등이 정부에 의해 일방적으로 선정됐다. 이 과정에서 경쟁과 효율은 도외시됐고, 정책금융과 집중적인 재정투융자로 인한 자원배분 왜곡 현상이 심각한 문제로 제기됐다.

둘째, 특정산업에 대한 자원집중과 과보호로 인해 환율 금리 등 가격변수가 왜곡됐고, 이로 인해 저축률 하락과 수출경쟁력 약화를 초래했다.

실례로 75년 당시 중화학 부문에 대한 대출금리는 연 12%인 반면 예금금리는 14~15%, 인플레율은 25.2%였다. 대출받은 기업은 곧바로 이익을 확보하게 되는 반면 저축한 가계는 오히려 10%의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구조였다. 당연히 저축률이 떨어질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투자기금을 동원해 금융기관 예금을 저리의 중화학공업 지원 자금으로 활용한 것도 문제였다. 시장금리가 15%를 넘는데 특정 분야에만 12%대로 지원하다 보니 결국 다른 산업부문의 희생을 담보로 중화학 분야을 지원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명백한 자원왜곡이자 시장교란이었다.

셋째, 주로 대기업들이 중화학공업을 담당하다 보니 재벌기업의 경제력 집중이 가속화됐고 이 과정에서 독과점 폐해를 유발했다. 이 같은 경제력 집중은 소비자, 중소기업, 경공업 분야의 희생을 기반으로 했다는 점에서 두고두고 형평의 문제로 지적된다. 대기업 위주의 정책지원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정경유착의 뿌리가 싹텄고, 그 파장이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점 역시 중화학 육성의 폐해로 지목된다.

◆ 위험한 승부수

간단치 않은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중화학공업 육성은 성공적 결과로 마무리된다.

당시 정부가 국제시장을 겨냥해 세계 최첨단 시설과 기술을 대거 도입함으로써 산업구조 고도화와 국제경쟁력 확보를 앞당겼다는 점은 중요한 성과로 꼽힌다. 가발이나 농산물 등 저부가가치 상품을 수출하던 나라에서 반도체 휴대폰 자동차 등 최첨단제품 수출국으로 변모하게 된 기반에는 70년대 중화학공업 육성이 자리하고 있다.

또 중화학공업 육성 과정에서 잘 교육된 우수한 기술인력들이 대거 양산됐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는 성과다. 이들은 80년대 이후 전 산업부문에 확산되면서 우리나라의 기술 수준을 한 단계 끌어 올리는 첨병 역할을 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70년대 중화학공업 육성은 제1,2차 경제개발계획 성공에 자신감을 얻은 박정희 정권이 `산업구조 개편`과 `방위산업 육성`이라는 새로운 의지를 실행하기 위해 선택한 위험한 승부수였다. 하지만 그 무리한 선택이 국내 산업구조를 고도화시키는 바탕이 되었고, 궁극적으로 한국 경제성장의 분수령이 된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당시 중화학공업 육성이 없었다면 현재의 IT강국, 세계 10위권 경제대국 입성이 가능했을 지 의문이다. 중화학공업 육성은 공업화 ‘시동기’에서 ‘성숙기’로 넘어가기 위한 정부의 위험한 승부수였지만 다행스럽게도 그 결과는 성공작으로 마무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