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시스] 김병문 기자 = 엔화 가치가 14일 연속 하락세를 이어가는 20일 오후 서울 중구 하나은행 위변조대응센터에서 직원이 엔화와 달러화를 검수하고 있다. 도쿄 외환시장에서 엔화 환율은 이날 장중 일시 1달러=129.40엔까지 떨어지며 2002년 4월 이래 20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2022.04.20. dadazon@newsis.com

[서울=뉴시스] 류난영 기자 = 우리나라 원화 가치가 지속적으로 하락하고 있다. 과거 원화 가치 하락은 수출 경쟁력을 높여 우리 경제에 호재로 작용했지만, 최근 오히려 악영향을 줄 것으로 우려되고 있다. 달러 강세로 수입 물가가 크게 올라 물가가 급등하게 되면 소비가 줄어 국내 경기 하방 압력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21일 외환시장에 따르면 전날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은 장중 한때 1240원을 다시 넘었다. 이후 일본 외환 당국의 구두 개입으로 달러-엔이 환율이 하락하면서 원·달러 환율에 하방 압력으로 작용, 1236.1원에 마감했다. 장중이긴 하지만 원·달러 환율이 1240원을 넘어선 것은 지난달 15일 (1242.8원) 이후 한 달 여 만이다.

최근 원화 약세는 미국의 고강도 긴축, 우크라이나 리스크 등 여러가지 악재가 쌓인 결과다. 통상적으로 원화 약세는 수출 증가로 이어져 경제에 호재로 작용한다. 하지만 최근에는 엔화 가치 하락까지 맞물리면서 호재보다는 악재로 작용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원화 약세가 물가를 끌어 올리고, 소비자들의 구매력을 낮춰 경기 하방 압력으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은 지난 20년간 자국의 통화 가치를 낮춰 경제를 성장시켜 오는 전략을 펼쳐왔다. 지난 1990년에도 물가 하락으로 인한 저성장의 늪에 빠지자 완화적인 통화정책을 펼쳤다. 엔저로 수출기업 경쟁력이 높아지고, 경제도 성장시킨다는 논리다. 일본은 경기둔화 위기때마다 ‘엔저’ 정책으로 극복해 왔다. 하지만 최근에는 물가만 높이고, 경기에는 하방 압력으로 작용하는 등 이 같은 정책이 더 이상 먹히지 않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 역시 원화 약세에 우려를 표했다. 이 총재는 지난 19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인사청문회에서 “환율이 절하(원화 약세)돼 물가 상승 압력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며 “한미 기준금리 격차를 너무 크지 않게 하면서도 전 세계 경제 상황을 보면서 속도를 조절해야 하는 미세한 정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또 원화 약세가 지속될 경우 수입 물가가 크게 오르면서 실질 구매력을 낮춰 소비가 줄어드는 등 경기 하방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일본은행도 자국의 엔화 약세에 대해 수출 개선 효과가 줄어들고 있다고 우려한 바 있다. 한은에 따르면 3월 우리나라의 수입물가지수는 148.8(2015=100)로 전월대비 7.3% 올라 3개월 연속 상승했다. 전월(4.6%) 보다도 상승폭이 확대된 것으로 2008년 5월(10.7%) 이후 13년 10개월 만에 최고 상승폭이다. 지수 자체로는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이미 원화 약세가 수입물가 상승으로 작용하고 있다. 문제는 소비다. 물가가 큰 폭으로 오를 경우 구매력 저하로 이어져 소비가 크게 하락할 수 있다.

이 총재도 이런 측면에서 물가와 경기를 모두 조율할 수 있는 통화정책 운영에 대한 고심을 드러냈다. 그는 “단기적으로 인플레이션과 싸워야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고령화로 인한 저성장 구조로 가지 않게 막아야 하는 구조적 노력을 해야 하는 복잡한 상황에 있다”고 말했다.

또 “일본 사례를 대표적으로 보고 있는데 고령화로 사이즈가 커지지 않고 소득과 성장률이 침체될 경우에는 부득이하게 국제적으로 위상도 낮아질 수 있기 때문에 그 경우를 대비해 생산성 등이 어떻게 더 늘어날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라고도 했다.

이 총재는 또 올해 초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국가부채를 언급하며, 우리도 일본처럼 저성장의 늪에 빠질 수 있다고 우려한 바 있다. 그는 “국가부채가 급증하는 가운데 일본은 잃어버린 10년을 경험했다”고 말했다. 또 “국제금융시장이 한국을 미국, 일본과 같이 취급해 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할지 아니면 제협력개발기구(OECD)국가이긴 하지만 기축통화를 보유하지 못한 터키, 멕시코와 같은 그룹이라 생각해 투자자금을 회수할지가 더 중요한 문제”라며 “원화가 국제통화가 아니기에 후자의 가능성이 더 크다고 본다”고 말했다.

과거 달러화 못지 않은 ‘안전자산’으로 여겨졌던 엔화 가치는 추락하고 있다. 20일 도쿄 외환시장에서 엔·달러 환율은 장중 129.40엔까지 상승하면서 130엔 돌파를 눈 앞에 두고 있다. 2002년 4월 24일(129.58엔) 이후 20년 만에 최고치다. 한국은행 경제통계시스템에 따르면 이날 원·엔 재정환율도 100엔당 956.06원을 기록중이다. 2018년 1월 9일(941.28원) 이후 4년 3개월 만에 가장 낮은 수준이다.

시장에서는 달러화 대비 엔화 약세 기조가 이어질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이 고강도 긴축이 지속될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일본은행은 금리 상승을 방어하기 위한 국채 매입을 지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엔저가 장기화 될 경우 일본과 첨예한 경쟁 관계에 있는 반도체 등 IT 업종, 자동차 업종 등 우리의 수출 경쟁력도 약해질 수 있다. 이 경우 원화 강세에도 불구하고 수출 경쟁력은 낮아지고, 물가만 올려 결국 저성장에 빠질 수 있다.

권아민 NH투자증권 연구원은 “엔화 약세가 추세적으로 지속될 경우 일본과 경합도가 높은 반도체, 디스플레이 등 IT 업종과 자동차·부품 등의 실적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우려했다.

가뜩이나 무역수지가 적자를 보이고 있는 상황에서 폭이 더 확대될 경우 경상수지까지 적자로 전환될 수 있다. 이 경우 나라 살림의 건전성을 보여주는 ‘재정수지’에 이어 대외 지불 능력을 보여주는 ‘경상수지’까지 적자를 보이는 등 이른바 ‘쌍둥이 적자’도 현실화 될 수 있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올해 3월 무역수지는 1억4000만 달러 적자를 기록했다. 무역수지는 국제유가 상승 등의 영향으로 지난해 12월과 지난 1월 두 달 연속 적자를 기록했다가 2월 흑자로 돌아섰다. 무역수지가 한 달 만에 다시 적자로 전환한 것은 수입이 636억2000만 달러로 전년 동기 대비 27.9% 늘며 사상 최고 수준을 보인 영향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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