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르고뉴 레드 소개할 때 퍼포먼스 좋은
북쪽 주브리 샹베르땡, 남쪽 지브리 애용해
직관적인 미국 피노누아에도 밀리지 않아
[블록미디어 권은중 기자] 와인을 마시다보면 잠깐 와인이라는 거대한 숲에서 길을 잃을 때가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 길을 잃어버릴 때가 언제인가하면 감히 부르고뉴 피노 누아를 욕망할 때다. 2년에 한번쯤은 그 미궁으로 빠져든다.
부르고뉴 피노 누아는 두 개의 가파른 벽으로 나를 짙누른다. 먼저 품종으로 피노 누아다. 피노누아는 껍질이 얇아 병충해에 약하고 기온을 많이 탄다. 재배가 까다롭다. 껍질이 얇다 보니 풍성한 맛보다는 섬세한 맛이 강하다. 떼루아를 가장 잘 반영한다고 하는데 “맛이 없을 가능성이 높다”는 말과 다름 아니다.
부르고뉴도 머리가 아프다. 먼저 이 지역의 포도밭은 아주 잘게 쪼개져 있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나폴레옹이 수도원에서 운영하던 포도밭을 뺴앗아 지역 농부들에게 쪼개어 나눠주었다. 다시 이 농부들이 자식들에게 지속적으로 균등상속하면서 밭들이 아주 작은 단위(클리마)로 이뤄져있다. 협회에 등록된 밭이 무려 1247개라고 한다(프랑스 관광청 자료). 여기에 와인 생산 업체만 2800개에 이른다.
이게 끝이 아니다. 클리마마다 기반암과 표토의 성격이 다르다. 그리고 밭의 위치, 햇빛이 드는 정도에 따라 맛이 다 달라진다. 거기에 해마다 포도 작황이 다르다. 피노 누아 한병을 살 때 경우의 수가 수백 만 가지가 넘는다. 이런 복잡한 경우의 수를 뚫고 맛있는 부르고뉴 레드 와인은 그래서 엄청나게 비싸다. 부르고뉴 피노 누아 그랑퀴리가 100만원을 우습게 넘는 건 이런 이유다. 비싼 건 1천만원이 넘는다. 심지어 화이트마저도 그렇다.
그래서 나는 미국 피노 누아를 주로 마신다. 미국은 날씨도 좋고 토양도 화산암이어서 피노 누아라도 맛이 힘차기 때문이다. 여리여리한 부르고뉴 피노 누아보다 훨씬 쉽게 다가갈 수 있다.

내가 부르고뉴를 경계하는 까닭
부르고뉴를 극도로 경계하는 내가 갑자기 부르고뉴 피노 누아를 찾아다니게 된 것은 내가 기술이사(와인을 고르는 역할을 한다)쯤으로 있는 와인 모임에서 프랑스 피노 누아를 해보자고 가끔 제안을 하기 때문이다. 뜯어 말리지만 회원들이 막무가내인 경우가 많다. ‘와인=부르고뉴 피노누아’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직도 제법 많다. 그럼 회비를 많이 걷어야 하는데 그것도 쉽지 않다.
이럴 때 내가 쓰는 편법이 주브리 샹베르탱(Gevrey-Chambertin)과 지브리다. 주브리(Gevrey)와 지브리(Givery)는 발음은 비슷한데 철자는 완전히 다르다. 그리고 동네도 상당히 다르다. 부르고뉴는 남쪽과 북쪽으로 나뉜다. 북쪽이 우리가 알고 있는 피노 누아 레드의 성지다(꼬뜨 드 뉘라고 부른다). 남쪽은 몽라쉐같은 화이트를 주로 생산한다. 북쪽을 대표하는 마을이 주브리 샹베르땡(본 로마네도 유명하다)이다. 원래는 이 마을은 주브리로 불렸는데 샹베르땡쪽 밭(클리마)이 워낙 좋아서 주브리 샹베르땡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얼마나 와인이 맛이 있으면 지명이 될까?
주브리 샹베르땡은 점토와 이회암으로 이뤄져 와인이 힘차다. 그래서 ‘부르고뉴의 왕’으로 불린다. 로마네 꽁티가 있는 본 로마네 마을보다 그랑퀴리가 더 많다. 그래서 부르고뉴 피노 누아 가운데 맛이 직관적이다.
반면 지브리는 화이트를 생산하는 꼬뜨 드 본 남쪽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꼬드 샬로네즈(Côte Chalonnaise)에 위치해 있다. 꼬뜨 드 본과 꼬뜨 샬로네즈는 기반암이 석회암이 많아서 프랑스 북쪽 샹파뉴처럼 샤르도네를 많이 생산하는 곳이다. 그런데 이 지대에도 피노 누아를 재배하기 좋은 점토와 이회함이 기반인 지역이 있다. 그게 지브리다. 샤르도네로 유명한 뫼르소(Merusault)와 붙어 있는 뽀마르(Pommard) 볼네이(Volnay)같은 지역도 최근 피노 누아 레드로 유명해지고 있다.

지브리가 왜 반가울까?
지브리가 피노 누아 와인으로 최근 뜨는 이유는 뭐니뭐니해도 가성비다. 북쪽 피노 누아가 워낙 비싸니까 남쪽 피노 누아에도 소비자들이 눈을 돌린 것이다. 거기다 요즘은 양조학이 발달해서 부르고뉴 피노 누아의 특장점을 완벽하게 구현한다.
지브리는 그랑 퀴리가 당연히 없지만 프리미어 퀴리가 있다. 그런데 이게 북쪽의 주브리 샹베르땡 지역의 프리미어 퀴리라면 가격은 50만원이 훨씬 넘는다. 하지만 지브리는 10만원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주브리와 지브리의 피노 누아 대결은 점토와 석회암의 대결, 명성과 언더독의 대결인 셈이다. 지브리를 내가 늘 고르는 까닭이다.
다음은 주부리 샹베르땡. 나는 부르고뉴의 유명한 네고시앙인 루이 자도(Louis Jadot) 주브리 샹베르땡을 선호한다. 그런데 이게 요즘 보이질 않았다. 원-유로화 환율이 천정부지이다보니 수입이 원활하지 않은 것 같다. 작년말까지만 해도 10만대 초반이었는데 지금은 16만원까지 한다. 그래서 대안으로 선택한 것이 도멘 올리비에 귀요(Domaine Oliveir Guyot)였다. 지브리 프리미에 크뤼는 메종 상지 샹 사로(Maison Chanzy Le Champ Lalot)를 골랐다. 두병 다 비비노 평점은 4.0이 넘었다(메종 상지가 좀더 평점이 좋았다).
그리고 여기에 하나 더. 부르고뉴 피노누아의 비교 대상으로 미국 오리건의 도멘 드루앵 던디 힐 피노 누아(Domaine Drouhin Dundee Hill Pinot Noir)를 한병 추가했다. 신대륙 떼루아의 강건함을 비교하기 위해서였다.
부르고뉴 피노누아 즐거운 경험 선사해
저녁 모임은 7시여서 나는 2시부터 부르고뉴 피노 누아를 따놓았다. 공기와 접촉시켜 와인의 아로마를 깨우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5시반 집을 나설 때까지 와인은 나를 비웃듯이 열리지 않았다. 도멘 올리비에 귀요의 주브리 샹베르땡은 당연히 그럴 거라고 예상했다. 그렇지만 메종 상지가 의외였다. 지금까지 마셔본 지브리는 코르크를 딴 바로 직후에도 꽤 퍼포먼스가 좋았던 탓이다. 그런데 메종 상지는 엄청 단단했다. 그래서 반병을 디캔팅 했다. 한병을 다하면 또 완전히 열릴까봐 걱정이 된 탓이다.
그렇지만 식당에 가서도 이 두병은 열리지 않았다. 오전 9시쯤에 따놓았어야 했다. 그래서 이들은 1차적인 베리향이 강했다. 흙, 낙엽, 버섯, 가죽같은 복합향은 잘 느껴지지 않았다. 대중적으로 와인을 만드는 루이 자도나 페블레의 피노 누아를 구했어야 했나라는 아쉬움이 들었다. 이 두 네고시앙의 주브리 샹베르땡은 꽤나 발랄했던 기억이 있었다. 친구들은 꽤 만족하는 눈치였다. 다행이었다. 상큼함만 가득한 와인을 높게 평가해줘서 고마웠다.
하지만 소득도 있었다. 이들 프랑스 와인이 힘차다 보니 어떤 자리에서나 존재감을 뽐내던 미국 오리건의 도멘 드루앵 던디 힐이 존재감을 보이지 못했다. 잘 만든 프랑스 부르고뉴에 가성비 좋은 미국 피노 누아가 어깨를 펴지 못할 때가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성비라면 미국 와인 못지 않은 스페인의 템프라니요도 비슷했다. 마츠(Matsu)의 엘 비에호(El Viejo)가 평소라면 여러 가지 중첩된 맛이 느껴졌을텐데 이날은 밋밋하게 느껴졌다. 비리비리한 줄만 알았던 프랑스 부르고뉴에 이런 강단이 있다니. 즐거운 경험이었다.
모임에 프랑스 피노 누아를 준비하는 때는 늘 노심초사다. 가격도 비싸서 회비가 펑크가 나기일쑤이고 맛이 생각보다 없어서 회원들에게 지청구를 듣기도 한다. 그래도 이날은 나름 뿌듯했다. ‘헛기침만 하는 고집 센 양반’쯤으로 여겼던 피노 누아가 디캔팅이 필요할 정도로 단단하다는 것도 알았고, 카우보이 같이 힘센 미국 피노 누아와 붙여 놓아도 밀리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됐다. 지브리보다 더 힘차다는 부르고뉴 남쪽, 꼬드 드 본의 대표적인 마을인 뽀마르와 본네이 피노 누아도 슬슬 마셔봐야겠다라는 욕심도 생겼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부르고뉴 레드에 대한 욕심이었다. 이제는 부르고뉴에서도 길을 잃어버리지 않을 것 같은 자신감도 ‘살짝’ 생겼다.
*권은중 전문기자는 기자로 20여 년 일하다 50세에 이탈리아 북부 피에몬테의 ‘외국인을 위한 이탈리아 요리학교(ICIF)’에 유학을 다녀왔다. 귀국 후 , 경향신문 연합뉴스 농민신문 등에 음식과 와인 칼럼을 써왔고, 관련 강연을 해왔다. 『와인은 참치 마요』, 『파스타에서 이탈리아를 맛보다』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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