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 박재형 특파원

블록체인을 정치과정에 이용하는 것에 대한 기대는 곧 블록체인을 통한 민주주의 정치 시스템의 변화 가능성에 대한 기대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블록체인은 현재의 대의제를 통한 간접민주주의를 오래 전부터 민주주의의 이상으로 여겨져 왔던 직접민주주의에 가깝도록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인지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민주주의의 오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고대 아테네 사회는 현재의 모델들보다 훨씬 더 직접적이고 참여적인 시스템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플라톤은 “국가”(Republic)에서 아테네식 직접민주주의가 다수 의사의 왜곡 및 불평등의 심화 등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경고하기도 했다.

고대 아테네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직접 민주주의는 많은 사람들이 이상적인 시스템으로 여기고 있지만 플라톤의 지적처럼 오히려 정치를 망칠 가능성 또한 무시할 수 없다. 따라서 현행 간접민주주의에 직접민주주의적 요소를 통합시키는 방법으로 숙의 민주주의, 이슈 기반 민주주의 등 다양한 시도가 계속되고 있다.

숙의 민주주의(Deliberative Democracy)는 말 그대로 ‘숙의’ 또는 ‘심의’를 중심으로 정책 등 의사 결정이 이루어지는 민주주의 방식으로, 다수결 원리와 합의에 의한 결정을 모두 포함한다는 것이 특징이라는 점에서 기존 통용되는 민주주의 개념과 차이가 있다.

이러한 숙의 민주주의와 관련된 최근 사례로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 추진 과정에서 신고리 원전 5, 6호기 공사 중단 문제 결정을 위해 이루어진 공론화위원회가 있다. 이는 한국에서 처음 시도된 숙의 민주주의식 공론화로서 의미가 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고도의 전문적 결정을 일반 시민의 손에 맡기는 것의 한계와 문제점 역시 그대로 노출시키며 무능력한 정부의 책임 전가라는 지적이 불가피했다.

오래 전부터 세계 각국에서 논의, 시도됐던 숙의 민주주의적 방식이 그것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생각 만큼 쉽게 정착하지 못하면서 보다 직접 민주주의적 요소를 효과적으로 강화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한 연구가 이어지고 있다. 이 과정에서 최근 정보과학기술의 발달과 함께 관심을 모으고 있는 것으로 ‘이슈 기반 직접 민주주의’(Issue Based Direct Democracy, IBDD)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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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BDD에서 유권자들은 모든 이슈에 대해 직접 투표하거나 자신의 투표권을 다른 사람에게 위임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또한 유권자들은 자신이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슈에 대한 투표를 위해 다른 이슈에 대한 투표를 포기할 수도 있다. 이처럼 이슈들 사이에 발생하는 기회비용은 유권자들의 표에 다른 가치를 부여해 표의 실질적 가치를 높이는 기능을 할 수 있다.

호주의 플럭스(Flux)는 첨단 IT기술, 특히 블록체인 기술을 통한 IBDD를 추구하는 새로운 개념의 정당이라고 할 수 있다. 플럭스는 현행 입법부 자체를 IBDD 시스템으로 대체하려는 정치 운동을 호주 뿐 아니라 미국, 브라질 등 해외 조직들과 연계하는 방식으로 확대해가는 중이다.

플럭스는 진보, 보수 등 정치적 이념을 떠나 정치적 표현을 통해 진정한 정치적 힘의 분배를 목표로 하고 있다고 강조한다. 크든 작든 모든 호주인들의 정치적 참여를 소중하게 여기며, 훌륭한 정책을 마련하기 위한 자율적이면서도 전문적인 시스템 구축을 목표로 하고 있는데, 이를 가능하게 하는 기반으로 첨단 온라인 기술, 특히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한다.

또한 플럭스는 모든 사람들이 의회의 역할과 기능에 참여할 수 있도록 재설계된 시스템을 통해 정치적 권력과 정책적 효율성을 추구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들의 목표 실현을 위한 핵심 도구로서 플럭스의 모체라고 할 수 있는 블록체인 기반 투표 시스템 개발 스타트업 시큐어 보트(Secure Vote)가 개발한 플럭스 앱을 보급하고 있다.

블록체인 등 첨단 기술을 기반으로 IBDD 보급을 위해 노력하는 플럭스는 모든 정치 참여자들에게 직접 투표를 하거나 투표 기회를 남겨두는 등 보다 넓은 선택권을 허용하는 것에 더해서, 자신의 투표를 경우에 따라 철회할 수 있는 기회까지 제공할 것을 주장한다. 특정 정치인이나 정책에 대해 투표를 했더라도 나중에 자신의 표가 배신을 당했다고 판단될 경우 그것을 다시 가져갈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실제로 한국 뿐 아니라 어느 나라 유권자들이나 크고 작은 선거에서 투표를 한 후 자신의 선택에 대해 후회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특히 후보자의 능력, 공약을 믿고 투표를 했는데, 그것을 지키지 않거나 무능력을 드러낸 경우, 거짓말이나 부도덕한 행위, 범죄 등으로 유권자를 실망시키는 경우 등에 자신의 투표를 취소하고 그 기회를 다른 표로 행사하도록 한다는 것이 플럭스가 내세우는 IBDD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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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투표권을 남겨 두고 다른 투표에 그것을 이용하거나 이미 행사한 표를 철회하는 것은 현재 선거관리시스템에서는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블록체인 기술, 그 중에서도 중앙에서 관리하는 프라이빗 블록체인을 이용한 시스템에서는 가능하다는 것이 플럭스의 주장이다.

호주에서는 현재 플럭스 외에도 마이보트(MiVote)라는 시민단체가 블록체인 기반 모바일 투표 시스템을 이용한 숙의 민주주의 실험을 진행하고 있다. 이 단체는 블록체인 기반 마이보트 앱을 통해 호주의 정치 및 시민들의 생활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이슈들에 대한 다양한 관점을 모두가 공유하는 정보 플랫폼 제공이 목표라고 설명한다.

앞서 살펴본 사례들 외에도 세계적으로 블록체인 기술을 이용해 기존 간접 민주주의 시스템에 직접 민주주의적 요소를 통합시키려는 연구와 시도가 계속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아직 기술적으로나 정책적으로, 그리고 참여자들의 인식 등에서 걸음마 단계에도 못 미친다고 하겠지만 세상이 필요로 하는 공정하고 효율적인 민주주의 시스템 개발에서 블록체인 기술의 역할과 중요성은 날로 커지고 있는 만큼 이와 관련한 광범위하고 심도 있는 연구가 더욱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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