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록미디어 명정선 기자] 2025년 6월 탈중앙화 금융(DeFi·디파이) 대출 시장의 총예치금(TVL)이 559억 달러를 돌파하며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 이는 2021년 디파이 열풍 당시의 고점을 넘어선 수치로, 시장은 단순한 반등을 넘어 구조적 변곡점에 들어섰다는 평가가 나온다. 디파이 대출은 스마트 계약 기반 자동화 금융 서비스로, 은행 계좌나 신용등급 없이도 누구나 자산을 담보로 대출을 받을 수 있는 새로운 금융 모델이다. 그리고 지금, 이 시스템이 본격적인 ‘온체인 신용 사이클’을 개막하고 있다.
코드로 움직이는 신용 시장
디파이 대출은 블록체인 위에서 작동하는 스마트 계약(Smart Contract)을 통해 이뤄진다. 사용자는 암호화폐를 담보로 맡기고 일정 비율의 다른 암호화폐를 빌릴 수 있으며, 이 과정은 일체의 인적 심사나 중개자 없이 자동으로 처리된다. 담보로는 주로 이더리움(ETH), 비트코인(WBTC), USDC, DAI 같은 스테이블코인이 활용된다. 대출이 이뤄지면 사용자는 ‘이자 수익 토큰’을 받아 원금과 함께 되돌려받을 수 있고, 반대편에서는 자산을 유동화해 활용하고 싶은 차입자가 등장한다.
기존 금융과 무엇이 다른가
바로 이 지점에서 디파이 대출은 전통 금융과 본질적으로 다른 특성을 드러낸다. 은행 대출이 신용 점수, 소득 이력 등 ‘개인의 신용’을 중심으로 승인 여부를 판단하는 반면, 디파이는 ‘담보’를 중심으로 작동한다. 사용자는 대출을 받기 위해 자신의 자산을 플랫폼에 먼저 예치해야 하며, 그 가치보다 더 적은 금액만을 대출받을 수 있다.
이러한 ‘초과 담보(overcollateralization)’ 구조는 대출자가 상환하지 않더라도 시스템이 자동으로 담보를 청산해 손실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설계돼 있다. 누구나 지갑만 있으면 참여할 수 있는 접근성과, 스마트 계약 기반의 자동화된 신용 판단 구조는 디파이 대출을 새로운 금융 모델로 만들고 있다.
‘디파이 붐’을 지나 다시 주목받는 온체인 대출
디파이 렌딩 시장은 2021년 DeFi 붐 당시 300억 달러 이상의 TVL(Total Value Locked)을 기록했으나, 2022년 테라-루나 사태 및 FTX 파산 등으로 급격히 침체됐다. 하지만 2023년 중반 이후 기관 투자자 중심의 자금 유입과 스테이블코인 유동성 회복, 이더리움 레이어2 확장 등의 이슈로 시장이 재점화됐다. 특히 최근에는 블랙록, 시타델 등 전통 금융 자본이 디파이 인프라에 직접 투자하거나 파트너십을 맺는 사례도 증가하고 있다.
아베(Aave)에서 스파크(Spark)까지… ‘플랫폼 경쟁’
이번 디파이 대출 시장의 재도약은 Aave를 정점으로 한 주요 프로토콜들의 경쟁 구도가 만들어낸 결과이기도 하다. 더블록과 디파이라마 데이터에 따르면, Aave의 총예치금은 260억 달러를 돌파하며 업계 1위를 유지 중이다. 일일 수수료 수익은 160만 달러를 넘었고, AAVE 토큰은 최근 3개월간 65% 이상 상승했다. 이러한 성장의 배경에는 단순한 금리 수익을 넘어선 Aave의 전략적 진화가 자리잡고 있다.
- 아베(Aave)
아베(Aave)는 다양한 암호화폐를 예치하고 대출할 수 있는 기능을 제공하는 대표적인 디파이 대출 프로토콜이다. 이 플랫폼의 특징 중 하나는 ‘플래시 론(Flash Loan)’ 기능으로, 담보 없이도 단일 거래 내에서 대출과 상환이 동시에 이뤄지는 구조다. 또한 고정 및 변동 이자율 옵션을 제공해 사용자가 상황에 맞게 선택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이더리움(Ethereum), 폴리곤(Polygon), 아발란체(Avalanche) 등 다양한 체인에서 운영된다.
Aave는 다양한 암호화폐를 예치·차입할 수 있는 기본 기능 외에도, 최근에는 ‘루핑(looping)’ 전략을 핵심 성장 모델로 내세우고 있다. 이는 사용자가 리퀴드 스테이킹 토큰(LST)을 담보로 ETH를 대출받은 뒤, 그 ETH를 다시 스테이킹해 수익을 올리는 구조다. 사용자 입장에선 자산을 팔지 않고도 복합적인 수익을 창출할 수 있으며, Aave는 이 과정에서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대출·예치 수수료를 통해 유동성과 수익을 동시에 확보하게 된다. 실제로 이러한 루핑 수요는 이더리움 LST 시장의 성장과 맞물려 Aave 플랫폼의 예치금 증가에 직접적인 기여를 하고 있다.
또한 Aave는 v4 업그레이드를 통해 체인 간 유동성 통합과 모듈형 거버넌스를 도입하며 확장성과 정책 유연성을 강화했다. 더불어 ‘세이프티 모듈(Safety Module)’이라는 자율 보험 시스템도 도입돼, 스마트 계약 리스크에 대비한 보장 메커니즘을 갖췄다는 점에서도 주목된다.
- 모르포(MORPHO)
중소형 플랫폼의 약진도 눈에 띈다. 특히 모르포(Morpho)는 아베(Aave) 및 컴파운드의 유동성을 기반으로 하되, 보다 사용자 중심의 P2P 대출 구조를 채택한 것이 특징이다. 대출자는 조건을 지정해 대출 요청을 올리고, 투자자는 해당 조건에 직접 대응해 자산을 공급하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모르포는 현재 코인베이스(Coinbase)와 결제 서비스 스트라이크(Strike) 등의 대출 상품을 지원하는 기술 플랫폼이다. 2024년 말 MORPHO 토큰 출시 이후 사용자는 급증했고, 총예치금은 42억4800만 달러를 기록하며 TVL 기준 3위에 올랐다. 무엇보다 Morpho는 ‘비효율적인 풀 기반 대출 구조를 대체하는 모듈형 대출 마켓’을 지향하며, 사용자 맞춤형 대출 환경을 구축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 스파크(Spark)
스파크(Spark)는 스테이블코인 중심 대출 기능에 특화된 디파이(DeFi) 플랫폼이다. 메이커다오(MakerDAO)의 후속 생태계인 Sky에서 개발된 디파이 대출 플랫폼으로, 스테이블코인 중심 구조에 특화돼 있다. 예치 시 자동으로 이자 수익형 토큰(sUSDS)으로 전환되며, 이 수익률은 ‘스카이 세이빙스 금리(Sky Savings Rate)’에 따라 책정된다. 이는 전통 금융의 정기예금 시스템과 유사한 구조를 블록체인에 적용한 모델로, 현재 기준 8~9% 수준의 연수익률을 제공한다. Spark는 ETH, DAI, stETH, USDC를 담보로 활용하며, 위험관리 측면에서도 ‘E-모드’, ‘격리 모드’, ‘사일로 모드’ 등 3단계 리스크 관리 기능을 갖추고 있다.
- 컴파운드(Compound)
컴파운드(Compound)는 알고리즘 기반의 머니 마켓을 활용해 사용자들이 중개자 없이 암호화폐를 예치하거나 차입할 수 있도록 한다. 예치와 대출이 가능한 자산에 대해 수요와 공급에 따라 실시간으로 이자율이 조정되는 구조를 채택해, 시장의 유동성에 따라 자동으로 최적화된 이자 수익이 발생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특히 단순한 예치만으로도 자동으로 이자를 받을 수 있는 구조를 갖추고 있어 사용자 편의성이 높다.
- 메이플(Maple)
기관 대상 대출에 특화된 메이플(Maple)도 눈에 띄는 행보다. Maple은 온체인 민간신용(Private Credit) 구조를 통해, 토큰화된 채권이나 실물 기반 자산을 기반으로 기관 대출을 유치하고 있다. Maple은 실물 경제와 디파이 생태계를 연결하는 브리지 역할을 자처하며, 특히 미국의 채권 시장과 연계된 ‘온체인 RWA 대출 상품’ 확대에 집중하고 있다.
이처럼 디파이 대출 시장은 단일 기능의 예치·차입을 넘어, 수익형 구조, 위험 분산, 기관 연결성, 사용자 맞춤화 등 다양한 전략을 바탕으로 차별화되고 있다. 각 플랫폼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유동성을 유치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전체 디파이 생태계는 기술·자본·이용자 층 모두에서 보다 성숙한 방향으로 진화 중이다.
CeFi에서 제도권으로… 기관의 본격 진입
시장 구조도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실물자산(RWA), 토큰화된 부채, 소버린 풀(Sovereign Pool) 등 새로운 금융 인프라가 디파이 생태계에 도입되며 유동성 유입과 함께 기관 참여 가능성도 커지고 있다. 테더(Tether), 갤럭시(Galaxy), 리든(Ledn) 등 CeFi 대출 기업들도 일부 온체인 서비스를 접목해 혼합 모델로 진화하고 있으며,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의 규제 완화(SAB-122 발행)와 ETF 승인 이후 전통 금융기관의 진입도 본격화되고 있다. Cantor Fitzgerald 등 기존 증권사는 프라임 브로커리지 서비스를 통해 디지털 자산 기반 대출 시장에 진출했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변화를 통해 전통 금융과 디파이 간 경계가 점차 허물어지고 있다고 보고 있다. 업계는 이번 상승세가 단기 반등이 아닌, 금융이 온체인에서 이뤄지는 새로운 신용 사이클의 출발점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위험요인은? 스마트 계약 리스크·청산 리스크 여전
물론 위험도 존재한다. 가장 큰 리스크는 스마트 계약 자체의 취약성이다. 코드에 버그가 있거나 오라클 데이터에 오류가 생기면 치명적인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 실제로 Morpho에서는 오라클의 소수점 오류로 350달러 담보로 23만 달러를 대출받는 사건이 발생한 바 있다.
또한 담보 자산 가격이 급락할 경우 자동 청산이 발생하며, 이는 연쇄적인 유동성 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 이자율이 실시간으로 변동된다는 점도 리스크다. 대출 당시 낮은 이자율이더라도 상환 시에는 급등해 있을 수 있으며, 이는 담보 유지 부담을 가중시킨다. 무엇보다 디파이는 탈중앙화된 구조이기에, 문제 발생 시 책임 주체가 없다는 점에서 전통 금융보다 ‘사용자 리스크’가 크다.
온체인 대출, 또 다른 금융의 진화
디파이 대출의 본질은 기존 금융 시스템의 디지털 재현이 아니다. 그것은 신용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 즉 자산·계약·위험을 전산화된 코드로 해석하는 방식의 혁신이다. 국제통화기금( IMF)에 따르면, 2023년 기준 전 세계 민간부채 규모는 150조 달러를 초과한다. 디파이 렌딩은 글로벌 부채 150조 달러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이다. 그러나 “제3의 금융 인프라”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기술적 안정성과 규제 명확성이 확보된다면, 디파이 렌딩은 신용점수도, 계좌도 없는 10억 명의 전 세계 언뱅크드(unbanked, 금융소외계층) 인구에게 실질적 대안을 제공할 수 있다. 그리고 이미 그 방향으로 조용히, 그러나 꾸준히 자금이 이동하고 있다. Galaxy는 “온체인 대출은 이미 디지털 자산 기반 금융 인프라의 핵심으로 자리잡았으며, 향후 제도권 금융과의 융합을 통해 대규모 채택이 예상된다”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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