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록미디어 박현재]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이란-이스라엘 간 군사적 긴장 고조 속에서 비트코인(BTC)이 새로운 의미로 조명되고 있다. 총성이 오가는 분쟁 한복판에서 은행 시스템이 마비되자, 비트코인은 국경과 제약을 넘어 생존을 위한 금융 수단으로 떠올랐다. 가격 급등락과 무관하게 사용성은 한층 강화되고 있으며, 글로벌 디지털 금으로서의 내러티브도 현실 속 사례와 함께 힘을 얻고 있다.
전쟁 속 등장한 ‘비트코인 생존’ 사례, 글로벌 자산 인식 높여
지난 2022년 2월 러시아의 침공 직후, 우크라이나 정부는 공식 SNS를 통해 비트코인(BTC)과 이더리움(ETH), 테더(USDT) 등 디지털자산 기부를 호소했다. 며칠 만에 전 세계에서 수억 달러 상당의 암호자산이 모여들었고, “은행과 국제 송금망이 마비된 상황에서 디지털자산이 유일한 생존 수단이 됐다”는 것이 우크라이나 정부의 설명이었다.
실제로 2023년 7월 기준으로 우크라이나에 모인 디지털자산 후원금은 2억 2천5백만 달러에 달하며, 정부와 민간이 함께 운영한 ‘원조 펀드’ 등을 통해 군사 및 인도주의 지원에 사용됐다. 정부가 주도한 디지털자산 모금 캠페인이 국가 방어에 기여한 선례를 남겼다.
전쟁은 동시에 개인들에게도 디지털자산을 생존 도구로 만들었다. 전쟁 발발 후 우크라이나 정부가 자본 유출을 막기 위해 해외 송금을 제한하면서 난민들은 해외에서 은행계좌 개설조차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다. 이때 현지 화폐나 계좌 접근이 막힌 많은 이들이 비트코인과 같은 디지털자산에 눈을 돌렸다.
지갑 하나만 있으면 국경을 넘어 자산을 옮길 수 있다는 점에서, 디지털자산은 전쟁 난민들에게 생명선 역할을 한 것이다. 실제로 유엔 세계식량계획(WFP)은 요르단 난민캠프에서 홍채 인식과 블록체인을 활용한 식량배급 시스템을 운영해, 은행계좌 없이도 난민들이 본인 인증과 지원금을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었다. 높은 수수료와 신원 노출 위험을 줄이고 투명성을 확보한 이 시스템은 분쟁 지역 구호에 블록체인 기술이 기여한 혁신적 사례로 평가된다.
실제로 디지털자산을 활용한 기부는 전세계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기빙블록(The Giving Block)의 분석에 따르면 2024년 전 세계 암호자산 기부 규모는 10억 달러를 넘어서며 사상 최대치를 기록할 전망이다. 국내에서도 디지털자산 기반 기부 플랫폼이 활성화되어, 예컨대 블록체인 기부 플랫폼 ‘체리’는 25년 누적 기부액 200억 원을 돌파했다.
한국 디지털자산 거래소 업비트의 운영사 두나무는 지난 1일 국제구호단체의 디지털자산 매도를 지원하는 첫 행보를 보였다. 전쟁이라는 위기가 블록체인과 디지털자산을 인도주의의 최전선 도구로 부각시키고 있는 셈이다.
긴장 고조에 비트코인 수요 증가 “군사적 긴장에도 비트코인 가격 안정”
최근 중동에서 이스라엘-이란 간 군사적 충돌이 벌어지자, 글로벌 투자자들은 비트코인에 다시 주목했다. 6월 이란과 이스라엘 사이의 무력 충돌 우려가 커지던 일주일 간, 미국 시장의 비트코인 현물 ETF들에는 17억 달러에 이르는 자금이 순유입되어 한달여 만의 최대 주간 유입을 기록했다.
6월 10일부터 17일까지 비트코인 ETF로 하루 평균 2억4천4백만 달러가 유입됐으며, 특히 이란에 대한 군사행동설이 구체화되던 6월 13일과 16일에 자금 유입이 정점을 찍었다고 한다. 이는 전통 금융시장이 지정학적 충격에 흔들릴 때 기관 자금이 비트코인을 대안 자산으로 편입하려는 움직임이 있음을 시사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군사적 긴장 국면에서 비트코인 가격의 변동성이 비교적 안정적이었다는 사실이다. 이스라엘-이란 간 휴전 협상이 결렬되고 민간 대피령이 보도되던 동안에도 비트코인 가격은 6월 10일 약 10만 4천 달러에서 17일 10만 8천 달러까지 완만한 상승세를 그리며 새로운 면모를 보였다.
전쟁 공포로 유가가 10% 넘게 급등하고 증시가 출렁이는 와중에도, 비트코인은 오히려 견조한 흐름을 유지한 것이다. 이는 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나 23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때와 유사한 패턴으로, “초기에는 위험자산 회피로 가격이 5~7% 급락했지만 며칠 내 안정과 반등을 찾는 전형적인 양상이”었다고 시장분석업체 샌티먼트(Santiment)는 전했다.
결국 “지정학적 위기에서 비트코인은 일단 ‘리스크 오프’ 이후 안정화”되는 경향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이다. 다만, 모든 위기 국면에서 비트코인이 항상 강세를 보이는 것은 아니다. 이달 초 이스라엘의 이란 핵시설 공습 직후에는 비트코인이 하루 새 5% 넘게 급락하며 1,080억 달러 상당의 포지션이 청산되기도 했다.
이스라엘의 작전명 ‘라이징 라이온’으로 시작된 공격에 시장이 놀란 듯, 비트코인과 이더리움은 나란히 4억 달러 이상의 청산 규모를 기록하며 전통 위험자산과 동조화된 움직임을 보였다.
“법정통화 불안과 지정학적 쇼크에 대한 헤지 수단”이라는 비트코인의 오래된 내러티브에도 불구하고, 정작 극심한 단기 위기에서는 현금화와 유동성 확보라는 투자자 본능 앞에 속절없이 출렁이는 모습도 드러난 셈이다. 이는 비트코인이 디지털 금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넘어야 할 단기 변동성의 벽을 보여주는 사례다.
가격은 출렁여도, ‘디지털 금’ 내러티브는 강화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단기 변동성에도 불구하고, 분쟁과 위기는 비트코인의 근본 가치 내러티브를 오히려 강화시키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금융시스템의 공백을 메우고, 피난민의 손에 쥔 지갑이 되어준 실사용 사례들은 “비트코인은 독립적인 글로벌 가치 저장수단”이라는 담론에 힘을 실어준다.
우크라이나 디지털부 차관 올렉산드르 보르냐코프는 “전시 상황에서는 모든 기회를 활용해야 하며, 암호화폐 합법화는 수조 흐리브나 규모의 강력한 경제 효과를 낼 것”이라 강조했다.
실제 IMF와 맺은 협약에도 우크라이나는 2024년 말까지 가상자산 관련 법제 정비를 약속한 상태다. 전쟁이 디지털자산의 필요성을 역설적으로 증명해 보이자 국가 차원에서도 제도권 편입을 서두르는 모습이다. 국제 투자기관들의 시각도 비슷하다.
유리엔 티머 글로벌 자산운용사 피델리티의 매크로 디렉터는 “금 가격이 최근 강세를 보였지만, 이제 바통을 비트코인이 이어받는 모습”이라며, 비트코인이 온스당 3,200달러대의 금과 비슷한 위험조정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고 분석했다.
그는 금 대비 4:1 비율로 비트코인을 편입하면 “두 자산이 상호보완적인 가치 저장수단으로 시너지를 내며, 비트코인의 변동성을 완화하면서도 장기 수익 잠재력을 확보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금과 비트코인을 동급의 투자 자산군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강화되고 있는 것이다.
ARK인베스트의 보고서 역시 비트코인을 ‘날렵하고 투명한 가치 저장수단’, 이른바 디지털 골드로 평가한다. 2025년 4월 ARK는 비트코인 한 개당 240만 달러까지도 갈 수 있다는 장밋빛 전망을 내놓았는데, 그 근거 중 하나로 “비트코인이 금의 약 60%에 달하는 시가총액을 흡수할 경우”를 들었다. 보고서는 신흥시장에서 통화가치 하락을 헤지하려는 수요와 기관·국가 차원의 채택까지 감안하면 비트코인의 상승 여력이 크다고 강조한다.
비트코인, 글로벌 디지털 금으로 가는 길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은 비트코인에 가혹한 스트레스 테스트이자 역설적인 성장 촉매가 되고 있다. 전쟁이라는 변동성에 노출되는 자산의 특성을 보이긴 했으나 그 와중에도 끊기지 않은 거래와 구호자금 전달은 비트코인의 본질적 가치를 입증해 보였다. 가격이 요동쳐도 블록에 기록된 신뢰는 굳건했다.
분쟁의 불확실성이 짙어질수록 오히려 “비트코인은 누구의 것도 아닌 독립적 자산”이라는 인식이 퍼지고 있다. 은행 문이 닫혀도, 국경이 막혀도 열려 있는 통화 시스템으로써 비트코인이 전쟁 속에서 활약했다. 전통적인 금의 역할을 일부 대체하는 셈이다. 다만 금이 물리적 제약을 넘어설 수 없었던 반면, 비트코인은 인터넷만 있으면 어디서든 접근 가능하다는 점에서 한 발 더 나아간다.
2020년대 들어 수차례의 위기 국면을 지나며 비트코인은 ‘디지털 금’이라는 별칭에 걸맞은 면모를 갖춰가고 있다. 가격이 오르내려도 그 유용성과 희소성에 대한 믿음은 점차 확고해지는 모양새다. 전쟁이 바꿔놓은 경제 지형 속에서, 비트코인은 이제 단순한 투기 자산을 넘어 글로벌 가치 저장수단으로서의 길을 닦아나가고 있다.
같이 보면 좋은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