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록미디어]

템프라니요, 순대·매운탕과 잘 어울려
엘비에호, 100년된 나무의 템프라니요로
와인 빚어 장기숙성…응축미 뛰어나
[블록미디어 권은중 전문기자] 한국음식 가운데 와인과 궁합이 좋은 음식들이 제법 많다. 불고기, 삼겹살같은 고기 요리는 물론이고 생선전, 회같은 해물 요리도 와인과 잘 어울린다. 그런데 의외로 저렴한 분식도 와인과 찰떡 궁합이다. 김떡순(김밥, 떡볶이, 순대의 약자)으로 대표되는 분식 3총사가 모두 와인과 잘 어울리는데 이 가운데 순대가 으뜸이 아닐까 싶다.
전통 방식으로 만든 순대는 물론이고 콜라겐 등을 사용한 인공 케이싱을 쓴 분식점 순대도 와인과의 페이링이 탁월하다. 이는 순대가 돼지 내장과 피에서 나오는 특유의 꼬릿한 향을 가진 단백질과 지방 덩어리이기 때문이다. 당면 순대 역시 자극적인 향과 함께 입안에 침이 고이게 하는 당면을 품고 있어 좋은 와인 안주가 된다. 서양에서 와인과 함께 소시지나 햄과 같은 사퀴테리를 놓고 즐기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특히 와인이 강하고 향이 강할 수록 이런 꼬릿한 내장 요리와 잘 어울린다. 와인이 진해야만 돼지 내장과 당면 순대의 맛과 향을 씻어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기름을 많이 써서 볶은 뒤 강한 소스를 끼얹는 중국요리에 소주보다는 고량주를 마시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서양에서도 순대와 비슷한 블랙 푸딩이나 부댕같은 돼지 내장 요리를 와인과 즐긴다. 부댕이나 블랙푸딩은 우리나라 피순대를 생각하면 된다. 물론 빵가루나 계피처럼 우리나라 순대와는 다른 맛을 주는 요소가 들어가기도 한다. 이런 서양식 피순대에는 프랑스 보르도의 메를로, 이탈리아 키안티의 산지오베제같은 진하고 부드러운 향을 가진 와인을 마신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순대는 어떤 와인이 어울릴까? 순대와 가장 잘 어울리는 와인은 단연 카르미네르다. 카르미네르는 칠레 등 남미에서 주로 나오는 레드 품종이다. 블랙베리와 블루베리 향이 강하지만 목넘김이 부드럽다. 마신 뒤에는 후추 계피같은 향신료향의 여운이 남는다. 칠레 레드 와인의 특징인 피망처럼 쌉쌀한 맛도 나서 순대의 기름기를 잘 잡아준다. 가격도 중저가로 저렴한 편이다. 다만 와인의 바디감이 미디엄 수준으로 부드러워서 순대를 소금을 찍어먹기보다는 마요네즈나 홀그레인 머스타드를 찍어먹는 게 좋다.
순대를 튀기면 또 이야기가 달라진다. 튀김은 재료의 수분을 뜨거운 기름으로 바꿔 채워넣는 요리다. 그래서 튀김은 강한 기름기 때문에 카르미네르보다 더 진한 와인이 필요하다. 아르헨티나 말벡, 스페인 템프라니요, 프랑스의 까리냥이 어울린다. 또 기름기를 잡아내는 강한 산도의 샴페인같은 스파클링 와인도 추천할만 하다.
서울 종로에 순대튀김을 내놓는 가성비 좋은 와인바가 있어 지난 6월 중순 대학 동창들과 주말에 우르르 몰려 가봤다. 우리가 선택한 와인은 스페인 토로(Toro)지역 템프라니요 100%로 만든 마츠(Matsu) 비에호였다. 마츠는 맛도 맛이지만 라벨에 청년, 중년, 노인을 그려넣은 독특한 디자인으로 유명한 와인이다.

청년 라벨을 붙인 와인은 “엘 피카로(El Picaro)”, 중년 라벨은 “엘 레시오(El Recio)”, 노인 라벨은 “엘 비에호 (El Viejo)”로 각각 불린다. 이는 포도나무의 연령과 와인의 숙성 정도를 남성의 나이로 표현한 것이다. 라벨의 모델은 와이너리에서 일하는 실제 인부들의 얼굴이라고 한다.
“마츠 엘 비에호”는 화학적 제초제나 살충제를 쓰지 않고 재배한 100년 이상의 포도나무에서 수확한 포도로 빚는다. 청년 와인은 90년 이하, 중년 와인은 90~100년 나무에서 재배한 포도를 쓴다. 엘 비에호는 정성스럽게 고른 포도와 오랜 숙성 덕에 강한 베리향과 묵직한 바디감을 자랑한다. 하지만 엘 비에호는 포도의 응축미와 섬세한 아로마가 감미로울 정도로 부드럽기도 했다. 세월의 조화다. 눈부신 오후 햇살을 받은 채 안락의자에 앉아있는 지혜로운 노인과 대화를 나누는 것 같았다.
좋은 와인을 단돈 8000원짜리 순대튀김과 함께 마시는 것에 약간의 꺼려짐도 있었다. 어쩌면 순대튀김과는 숙성을 덜 해 가격이 좀더 저렴한 엘 피카로나 엘 레시오가 더 어울렸을 수도 있다. 실제 템프라니요는 순대는 물론이고 불닭볶음면, 민물고기 매운탕처럼 도무지 와인과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한국적 색채가 강한 하드코어 안주와도 잘 어울린다. 꼭 비싼 와인일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순대튀김이라는 독특한 음식을 놓고 멋진 와인을 마시면서 나눈 이야기는 참 각별했다. 그래서일까? 내년에 함께 이탈리아로 해외여행을 가보면 어떻겠냐는 제안이 갑자기 튀어 나왔다. 바로 비행기표를 예매할 듯 다들 적극적이었다. 즉흥적인 해외여행 제안이 이루어질지는 미지수다. 하지만 우리는 그저 즐거운 상상만으로 예전의 대학생 때처럼 한참을 낄낄거릴 수 있었다. 아무 걱정없이. 엘 비에호와 순대튀김 덕분이었다.
* 권은중 전문기자는 기자로 20여 년 일하다 50세에 이탈리아 북부 피에몬테의 ‘외국인을 위한 이탈리아 요리학교(ICIF)’에 유학을 다녀왔다. 귀국 후 <경향신문>, <연합뉴스> 등에 음식과 와인 칼럼을 써왔고, 관련 강연을 해왔다. 『와인은 참치 마요』, 『파스타에서 이탈리아를 맛보다』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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