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록미디어 박혜진 교수] [블록미디어=박혜진 서울과학종합대학원 주임교수] 최근 코인베이스가 약 4조원에 달하는 천문학적인 금액으로 글로벌 암호화폐 파생상품 거래소 데리빗(Deribit) 인수를 발표하며, 업계에 다시 한번 강력한 지각 변동을 예고했다. 이는 단순한 외형 확장이나 거래량 증대 차원을 넘어선, 코인베이스의 치밀한 글로벌 전략이 담긴 행보다. 이번 인수를 통해 코인베이스는 이미 경쟁이 치열한 미국 시장을 넘어, 암호화폐 파생상품 분야의 글로벌 패권을 장악하겠다는 야심을 명확히 드러낸 것이다. 이러한 움직임의 진정한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단순 스타트업 투자를 넘어선 M&A(인수합병)의 본질을 이해해야 한다.
거인들의 선택, M&A: ‘만들기’보다 ‘사기’로 시간을 벌다
투자가 특정 기업의 ‘성장 가능성’에 대한 선제적 베팅이라면, M&A는 검증된 ‘기술과 시장, 그리고 고객’을 일거에 확보하는 전략적 선택이다. 특히 변화의 속도가 상상을 초월하는 크립토 산업에서는 기술 내재화, 조직 문화 통합, 그리고 결정적으로 시장 점유율 확보를 위한 ‘속도전’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많은 이들이 코인베이스, 리플, 크라켄과 같은 거대 플레이어들이 왜 충분한 내부적 리소스를 활용하여 자체 기술을 개발하는 대신, 이미 시장에 존재하는 스타트업이나 경쟁사를 인수하는 길을 택하는지 의문을 표한다. 답은 명확하다. 첫째, 블록체인 기술과 관련 서비스 모델의 진화 속도가 너무 빨라 내부 개발만으로는 시장 변화를 따라잡기 벅차다. 둘째, 글로벌 규제 환경이 파편화되어 있고 불확실성이 높아, 각 규제 관할권의 미묘한 차이를 이해하고 현지화된 인프라를 구축하는 데는 엄청난 시간과 비용이 소요된다. 이미 특정 시장에서 검증된 기술력, 고객 기반, 그리고 무엇보다 규제 준수 경험을 가진 기업을 인수하는 것이, 불확실성과 리스크가 큰 자체 개발 과정보다 훨씬 효율적이고 전략적인 판단인 것이다. 이는 ‘만들 것인가, 살 것인가(Build vs. Buy)’의 고전적 고민에서 ‘시간을 사는’ 결정에 가깝다.
최근 M&A 열풍의 핵심: ‘기관 시장’ 선점 경쟁
지난 4~5월, 암호화폐 업계에서 연이어 터져 나온 굵직한 인수합병 사례들은 이러한 거대한 흐름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코인베이스는 세계 최대 암호화폐 옵션 거래소인 데리빗 인수를 통해 선물·옵션 등 고도화된 파생상품 시장으로의 확장을 공식화했다. 리플은 기업용 디지털 자산 프라임 브로커리지 플랫폼인 히든로드(Hidden Road)를 인수하며, 국경 간 결제를 넘어 기업 고객 대상의 종합적인 디지털 자산 인프라 및 유동성 공급자로의 도약을 노리고 있다. 크라켄 역시 개인 투자자들에게 인기 있는 거래 플랫폼 닌자트레이더(NinjaTrader) 인수를 통해 리테일 파생상품 서비스 시장 공략을 본격화했으며, 증권형 토큰 플랫폼 시큐러타이즈(Securitize)는 MG스토버(MG Stover)의 디지털 자산 펀드 관리 부문을 인수하며 약 380억 달러 규모의 운용자산(AUM)을 확보, 기관 투자자 대상의 토큰화 증권 발행 및 관리 역량을 일괄적으로 제공할 수 있는 기반을 다졌다.
이들 M&A의 가장 두드러진 공통분모는 바로 ‘기관 투자자 시장으로의 본격적인 확장’이다. 비트코인 현물 ETF 승인 이후, 암호화폐 시장의 제도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기관 투자자들의 참여가 가시화되는 결정적인 변곡점에서, 이들을 위한 맞춤형 서비스와 규제 친화적인 인프라를 선제적으로 확보하는 것이 생존과 성장을 위한 최우선 과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블랙록, 피델리티, 골드만삭스와 같은 전통 금융의 거물들이 비트코인 ETF 시장에 직접 뛰어들거나 디지털 자산 커스터디(수탁) 서비스를 출시하는 배경 역시 동일하다. 이제 암호화폐 시장은 더 이상 개인 투자자 중심의 투기적 시장에 머무르지 않는다. 신뢰할 수 있는 인프라, 명확한 규제 대응 능력, 대규모 거래를 안정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시스템 안정성과 확장성이 핵심 경쟁력으로 부상한 것이다. M&A는 이러한 경쟁력을 단기간에 확보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다.
크립토 M&A의 숨은 전략: 장기 포석과 규제 헤지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최근의 크립토 산업 내 M&A들이 단기적 수익 증대보다는 장기적인 전략적 포석에 무게를 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데리빗은 미국이 아닌 두바이에 본사를 둔 거래소로, 코인베이스 입장에서는 상대적으로 규제 환경이 유연하거나 명확한 지역의 핵심 인프라를 확보함으로써 사업 리스크를 분산하고 글로벌 확장의 교두보를 마련하는 ‘규제 헤지(hedge)’ 전략의 일환으로 해석될 수 있다. 두바이 가상자산 규제청(VARA)과 같은 선제적인 규제 프레임워크를 갖춘 지역의 플레이어를 인수함으로써, 다양한 상품 라인업을 규제적 제약 없이 테스트하고 글로벌 시장에 공급할 수 있는 유연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규제 아비트라지(Regulatory Arbitrage)’를 적극 활용하여 글로벌 규제 환경의 차이를 기회로 삼고, 사업 포트폴리오를 다각화하며 지정학적 리스크까지 관리하려는 고도화된 움직임으로 볼 수 있다.
테크 빅뱅의 재현? M&A로 그려질 크립토 시장 향후 전망
이러한 M&A를 통한 시장 재편 및 확장 흐름은 앞으로 더욱 가속화될 전망이다. 전통 금융기관들이 자체적으로 블록체인 기술 스택을 처음부터 개발하거나 복잡한 암호화폐 시장에 직접 진출하기보다는, 이미 시장에서 기술력과 운영 노하우, 고객 기반을 검증받은 크립토 네이티브 기업이나 핀테크 팀을 인수하거나 전략적 파트너십을 체결하는 방식이 더욱 보편화될 가능성이 높다. 이는 마치 2000년대 초반 인터넷 산업의 성숙기에서 페이스북이 인스타그램과 왓츠앱 같은 잠재적 경쟁자이자 시너지 창출이 가능한 플랫폼들을 차례로 인수하며 모바일 시대의 거대한 플랫폼 제국을 구축한 역사와 유사한 경로를 밟고 있는 것이다. 즉, 크립토 시장 역시 단순 기술 개발 경쟁을 넘어, 시장 선점과 생태계 확장을 위한 속도와 전략적 판단이 더욱 중요해진 시기에 접어들었다. 다음 격전지는 탈중앙화 금융(DeFi) 프로토콜과 전통 금융 시스템을 연결하는 인터페이스 기술, 웹3 인프라의 핵심 요소(레이어2, 데이터 분석, 탈중앙화 신원인증 등), 그리고 실물자산 토큰화(RWA) 플랫폼 등이 될 가능성이 높다.
M&A 전쟁터, 한국 시장 참여자를 위한 통찰
이러한 글로벌 크립토 산업의 지각 변동은 국내 시장 참여자들 – 개인 투자자부터 기관 투자자, 그리고 혁신을 꿈꾸는 기업들까지 – 모두에게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단순히 어떤 코인이나 서비스가 단기적으로 유망한가를 넘어, 어떤 플레이어가 M&A를 통해 신뢰성과 안정성, 확장성을 갖춘 핵심 인프라를 구축하며 시장의 판을 새롭게 설계하고 있는지를 간파하는 것이 중요해졌다. 개인 투자자에게는 이러한 거대 흐름 속에서 장기적 가치를 지닌 플랫폼과 기술을 식별하는 안목을 요구하며, 기관 투자자에게는 시장 재편을 주도할 핵심 플레이어에 대한 면밀한 분석과 투자 전략 재검토를 촉구한다. 국내 기업들 역시 자체 성장 전략과 더불어, 시너지를 창출할 수 있는 M&A 기회를 적극적으로 탐색하거나, 반대로 매력적인 피인수 대상이 되기 위한 독보적인 기술력과 시장 경쟁력을 확보하는 과제에 직면해 있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글로벌 M&A를 통한 성장과 혁신의 흐름이 국내 시장에서는 종종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기도 한다. 대표적인 예가 수년째 표류하고 있는 바이낸스의 고팍스 인수 건이다. 글로벌 최대 거래소의 국내 시장 진출 및 부실 거래소 정상화라는 긍정적 기대에도 불구하고, 인수 승인 절차는 기약 없이 지연되고 있다. 그 사이 고팍스의 ‘고파이(GoFi)’ 상품에 묶인 자금을 회수하지 못하는 이용자들의 고통은 가중되고 있으며, 피해 규모는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이는 글로벌 차원의 M&A가 아무리 활발하다 한들, 국내 규제 환경의 불확실성이나 정책적 결단의 지연이 어떻게 시장 참여자들의 실제적인 피해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뼈아픈 사례다. 신속하고 투명한 의사결정 과정이 부재할 때, M&A를 통한 위기 해결이나 산업 발전의 기회는 소실되고 애꿎은 피해자만 양산될 수 있음을 경고하는 대목이다.
결국 자본력만으로는 이 변화의 파도를 넘을 수 없다. 각자의 위치에서 맞춤형 기술과 조직을 얼마나 잘 이해하고, 외부 역량을 효과적으로 흡수하거나 자체 역량을 강화하여 시너지를 극대화하느냐, 그리고 이러한 전략적 움직임이 예측 가능하고 합리적인 규제 환경 속에서 신속하게 뒷받침되느냐가 미래의 성패를 가를 것이다. 크립토 산업의 M&A는 이제 단순한 외형 확장을 넘어, 산업의 미래 지형도와 그 안에서의 생존을 건 전략적 전쟁터임을, 그리고 그 전쟁의 향방이 때로는 국내 시장 참여자들의 절박한 현실과도 맞닿아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박혜진 교수 약력
· 서울과학종합대학원 디지털자산·블록체인 석사과정 주임교수
· 바이야드 대표이사
· 심산벤처스(Simsan Ventures LONDON) 투자총괄
· 웹3.0 포럼 발기인 및 운영위원장
· 전 서울과학종합대학원 벤처캐피탈 MBA 부주임교수
· 전 스틱인베스트먼트, 네오플럭스, 하나금융그룹 등 인도 투자자문
박혜진 주임교수는 서울과학종합대학원 내 인공지능(AI) 대학원에서 디지털자산.블록체인 공학석사과정의 주임교수로 관련 산업의 스타트업과 투자자를 육성하고 있다. 주식회사 바이야드의 대표이사로 블록체인, 보안, AI 등 딥테크 관련 솔루션과 서비스를 개발하고 있으며 영국 심산벤처스의 한국지부 투자총괄 파트너를 겸임하며 디지털자산과 크립토 산업 생태계의 건강한 성장을 위한 기술 연구, 투자, 교육, 자문 등의 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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