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록미디어]
숙성도 을지로점, 교차 에이징으로
돼지 풍미와 육즙 한껏 끌어올려
고사리·멜젓, 풍성한 제주맛 선사
[블록미디어 권은중 전문기자] 2010년쯤부터 소고기를 숙성시켜 먹는 드라이 에이징이 한때 미식가들 사이에서 꽤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원래도 비싼 소고기의 겉면을 공기에 접촉시켜 변성을 줘 그 안쪽만 먹는 드라이 에이징 소고기는 가격이 만만치 않았다. 드라이 에이징을 하면 소고기에 육즙과 향이 고스란이 갇혀 견과류와 버터 향이 난다. 하지만 높은 가격이 접근을 쉽지 않게 했다.
그런데 이 숙성기법을 돼지에 적용하면 어떨까? 원래 고소하고 쫄깃하기로 소문난 제주 흑돼지를 이렇게 숙성한다면 말이다. 숙성도는 이런 아이디어로 2018년 제주시 노형동에서 처음 문을 연 식당이다. 1호점을 연 뒤 줄 서서 먹는 집으로 이름을 널리 알렸고 제주 지역에 분점을 냈다. 나도 제주에 갔을 때 한번 들렸다가 사람이 너무 많아 포기했던 곳이다.
그런데 이 숙성도가 부산, 광주, 인천, 경기 성남 판교에 이어 서울 을지로 3가에 문을 열었다. 제주도에서도 가기 힘든 집을 서울에서도 갈 수 있다니. 그래서 숙성도를 가봤다.
모던하고 쾌적한 공간에 압도돼
무엇보다 을지로 대로변 빌딩의 2층 전체를 쓸 정도로 넓은 실내가 압도적이었다. 이렇게 고기집이 넓을 수가. 그것도 갈비집도 아니고 돼지고기집이. 필자는 서울 중심가에서 이렇게 넓고 모던한 고기 집을 본 적이 없다. 그것도 소갈비도 아니고 돼지고기집이라니.
난 평소 제주 음식을 예찬해왔다. 한국 전통 음식의 원형을 가장 잘 지키고 있다는 이유다. 맛도 중요하지만 외부-외국을 말한다. 설탕, 식용유가 대표적이다-로부터의 간섭을 받지 않은 제주 음식은 우리 음식의 보배 가운데 보배다. 제주 음식을 유독 좋아하는 나이지만 숙성도의 매장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전통음식을, 제주 음식을 늘 응원했지만 이렇게 제주 음식의 승전보를 울려준 식당을 별로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내눈을 자극한 것은 식당 벽 한쪽 벽을 장식하고 있는 드라이 에이징중인 돼지고기다. 뭔가 전문적인 포스를 풍긴다. 훌륭하고 영리한 디스플레이다. 숙성도는 현재 제주돼지뿐 아니라 전국의 고품질 돼지를 스고 있다고 한다. 유럽에 가면 천정에 햄이나 소시지가 주렁주렁 걸려 있지 않는가? 어서와. ‘이런 전문식당은 처음이지’라는 자부심이 숙성도에는 곳곳에서 뿜어져 나온다. 점심 시간이 지난 오후 1시가 넘었는데 고객은 우리를 빼고 다 외국인이었다. 이미 외국인들 사이에도 유명한 모양이었다.
2층 전체를 대관하고 있어서 그런지 테이블과 테이블 사이가 넓직한 것도 좋았다. 다닥다닥 어깨를 붙어가며 불편하게 먹는 삼겹살집하고는 다르다. 미국이나 중동의 럭셔리한 스테이크집에 온 느낌이었다. 을지로가 내려보이는 뷰도 좋았다. 심지어 서빙하는 젊은이들도 하나같이 훈남이었다. 이 훈남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고기를 구워주고 잘라준다. 고기 먹는 방법도 하나하나 설명해준다. 이 정도면 성공을 넘어선 롱런할 것이 분명했다.
720숙성 삼겹살과 720발효 뼈목살을 시켰다. 30일을 숙성했다는 이야기다. 1인분 가격은 2만3000원. 일반 삼겹살에 견줘 비싸다. 하지만 족히 3cm는 됐을 법한 두께의 삼겹살이 등장하면 이런 생각은 싹 사라진다. 뼈가 붙은 목살도 두툼하다. 무엇보다 재미있는 것은 새송이 버섯에 찍힌 ‘돼지고기의 정점’이라는 구호였다. 이미 벽 한면 가득히 드라이 에이징 고기가 걸려있는 것만으로 충분한데 이런 디테일한 자신감이라니. 재미있었다. 고객에게 계속 호기심으로 말을 걸어준다. 게다가 고기에는 시키지 않아도 김치찌개가 따라 나온다. 고사리무침과 씻은 김치 그리고 멜젓(멸치젓의 제주방언)까지. 리필도 된다. 이 정도면 고기 가격이 비싸다는 생각을 갖지 않게 된다. 소비자가 뭘 원하는지 잘 아는 것 같았다.
고기는 숙성 덕에 퍽 부드러웠다. 숙성도의 고기는 2번 교차 숙성을 한다. 먼저 워터에이징이다. 원육을 진공포장 후 영하 1도 온도의 소금물에서 천천히 숙성한다. 이 방식으로 수분을 충분히 머금은 부드러운 원육을 만든다. 다음으로 워터에이징이 끝난 원육을 일정한 온도와 습도를 유지하는 저온숙성고에서 발효시키는 드라이에이징을 한다.
미생물을 고기에 착상시켜 숙성하는 방식으로 육향과 풍미를 끌어올리기 위한 과정이다. 미생물이 고기의 결합조직을 부드럽게 만들고 수분을 적당하게 증발시킨다. 그 과정에서 독특한 향을 갖게 한다고 한다. 그렇지만 멜젓과 된장에 찍어먹다보니 숙성된 돼지고기의 풍미인 치즈맛이나 견과류 맛은 느끼기 어려웠다. 드라이에이징만 한 다른 삼겹살에 견줘 이런 풍미는 약간 부족한 듯 느껴지기도 했다.
고사리와 씻은 백김치에 싸서 먹으니 맛이 있어서 둘이 가서 4인분을 후딱 먹어치웠다. 바질잎과 함께 고기를 먹는 모던한 돼지고기집인 금돼지집과 비슷하면서도 결이 다르다. 나는 전통적이라는 점에서 숙성도에 더 점수를 주고 싶었다. 만약 밤에 왔다면 기분이 좋아서 주변에 즐비한 ‘힙지로(힙하다+을지로의 결합어)’의 골뱅이집과 와인바에서 2차도 했을 것 같다.
제주에서 이미 탄탄하게 성공한 숙성 돼지고기집인 숙성도 을지로점은 ‘숙성돼지의 전당’으로 불려도 손색이 없어보인다. 제주라는 향토성과 드리이에이징 워터에이징이라는 푸드테크놀로지에 미국식 넓은 공간의 3박자는 감탄을 불러올 정도다. 지역 식당이 갈 길을 보여주는 곳이다.
주소: 삼일대로10길 36 2층
메뉴: 720숙성삼겹(1인분 2만3000원) 720발효숙성목살(1인분 2만3000원)
권은중 전문기자는 기자로 20여 년 일하다 50세에 이탈리아 북부 피에몬테의 ‘외국인을 위한 이탈리아 요리학교(ICIF)’에 유학을 다녀왔다. 귀국 후 음식과 와인 칼럼을 써왔고, 관련 강연을 해왔다. 『와인은 참치 마요』, 『파스타에서 이탈리아를 맛보다』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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