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록미디어 박현재] 영지식증명(ZK, Zero-Knowledge)은 블록체인과 암호 기술의 가장 핵심적인 혁신 중 하나로 꼽힌다. 하지만 ZK 기술은 ‘이론적으로는 완벽하지만 실제로는 느리고 복잡하다’는 한계로 인해 본격적인 상용화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리스크제로(RISC Zero)는 이를 정면으로 돌파하고 있다. 5월 출시된 R0VM 2.0은 기존 한계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성능 향상과 보안 검증 체계를 동시에 갖춘, 차세대 영지식 가상 머신(ZKVM)이다.
이 제품은 단순히 빨라졌다는 수준을 넘어, 블록 증명을 단 44초만에 수행하며, 실시간 ZK 롤업(real-time ZK rollup)을 가능하게 한다. 동시에 수학적으로 보안성이 입증된 결정성 회로(formally verified circuits)를 통해, 보안 취약점의 가장 흔한 원인을 구조적으로 제거했다. 이는 ZKVM이 연구실을 넘어 현실로 나오는 데 결정적인 전환점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 35분에서 44초로…ZKVM 실시간 시대를 여는 ‘속도’
R0VM 2.0이 제시하는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압도적인 증명 속도다. 기존 버전에서 이더리움 블록 하나를 증명하는 데 평균 35분이 걸렸다면, 2.0에서는 같은 작업이 44초 만에 완료된다.
이러한 속도는 ZK 기술의 대표적 활용 사례인 ZK롤업(zero-knowledge rollup)을 완전히 다른 수준으로 끌어올린다. 롤업은 수많은 트랜잭션을 하나로 묶어 증명함으로써, 블록체인의 처리량을 크게 높이지만, 증명 과정의 느림과 높은 비용이 늘 문제였다. R0VM 2.0은 이를 해결하며, ZK 롤업이 실시간 운영 가능한 현실적인 선택지로 떠오르게 했다.
비용 측면에서도 같은 흐름이 이어진다. 최근 칼루아(OP Kailua)를 기반으로 한 테스트에서는 블록당 증명 비용이 기존 1.355달러에서 0.2747달러로 감소했으며, 트랜잭션 단위로 환산하면 0.0012달러 수준까지 낮아지는 사례도 확인됐다. 이는 ZK 기반 시스템이 퍼블릭 블록체인뿐 아니라 △기업용 블록체인 △게임 △데이터 인증 서비스 등 다양한 영역으로 확장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연다.
성능 향상은 하드웨어와 회로 구조 개선에만 의존하지 않았다. 리스크제로는 자체 ZKVM 아키텍처를 지속적으로 최적화했고, RISC-V 기반 실행 엔진과 STARK 기반 증명 알고리즘을 결합해 병렬성, 효율성, 연산 단축을 극대화했다. 또한, 3GB까지 확장된 사용자 메모리는 과거보다 15배 이상 복잡한 계산을 처리할 수 있게 했다. 이는 ZKVM을 활용해 실시간 대화가 가능한 수준까지 도달한 것이다.
# 속도보다 더 중요한 건 신뢰…‘결정성’을 입증하다
속도 개선이 ZKVM의 실용성을 끌어올리는 것이라면, 보안 검증은 이 기술이 신뢰받기 위한 전제조건이다. 특히 영지식 기술에서는 회로 자체가 검증의 핵심이기 때문에, 회로에 단 하나의 오류라도 있다면 공격자는 잘못된 결과를 증명 가능한 것처럼 조작할 수 있다. 이런 오류 중 가장 흔하고 위험한 것이 바로 언더컨스트레인드 버그(underconstrained bug)다.
이는 회로에서 일부 제약 조건이 누락돼, 잘못된 계산 결과도 증명 가능한 것처럼 받아들여지는 오류다. 이 문제는 전체 ZK 보안 취약점의 3분의 2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제대로 된 방법이 없다면 검출조차 어렵다.
리스크제로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포멀 검증(formal verification)이라는 접근 방식을 채택했다. 이는 단순히 테스트 케이스를 실행해보는 것이 아니라, 수학적 방법으로 ‘회로가 항상 정확하게 작동한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절차다.
# Picus로 입증한 Keccak…세계 첫 ‘RISC-V 기반 검증 ZKVM’ 도전
포멀 검증을 위해 리스크제로는 보안 감사 전문 기업 버리다이즈(Veridise)와 협력하고, 자동화 검증 도구 피커스(Picus)를 도입했다. 이 도구는 입력과 출력의 관계를 추적해, 입력이 같으면 출력도 반드시 같아야 한다는 ‘결정성’을 입증하는 구조다.
첫 번째 검증 대상은 Keccak(케첵) 해시 회로였다. Keccak은 이더리움에서 사용되는 표준 해시 알고리즘으로, 특정 입력값에 대해 항상 동일한 해시값을 반환해 블록의 정합성을 보장한다. 리스크제로는 이 회로가 실제로 항상 동일한 결과를 출력한다는 점을 피커스로 수학적으로 증명했다.
검증 방식은 정적 분석(static analysis)과 SMT 솔버를 조합해 회로 내 변수 간 연산을 추적하고, 수십만 개에 달하는 제약 조건을 3분 이내에 자동 확인하는 방식이다.
현재는 RISC-V 기반 연산 회로(rv32im)에 대한 전체 결정성 검증도 진행 중이며, 이를 통해 세계 최초의 포멀 검증 완료 RISC-V ZKVM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 회로는 마치 ‘전자금고’와 같다. 포멀 검증은 금고 자물쇠가 매번 정확히 잠기고 풀리는지, 모든 경우의 수를 수학으로 확인한 절차다.
# 속도와 신뢰, 둘 다 잡은 ZKVM이 향하는 미래
리스크제로는 단순한 기술적 개선을 넘어, ZKVM이라는 시스템이 갖춰야 할 ‘신뢰 가능한 속도’의 기준을 세우고 있다. 2025년 7월까지 12초 이내 블록 증명이라는 실시간 proving 목표는 이를 상징한다.
이를 위해 자체 하드웨어 개발 파트너인 패브릭(Fabric), ZKVM 최적화 파트너 이레듀서블(Irreducible) 등과 협업 중이며, 동시에 누구나 참여 가능한 탈중앙 증명 네트워크 바운드리스(Boundless)도 적용해 신뢰성과 투명성까지 갖추려 한다. ZK 기술은 지금까지 연구자 중심의 영역에 머물렀지만, R0VM 2.0은 이를 실사용 환경에 가져오기 위한 첫 번째 실질적 성과다.
# ZK 기술의 실용화 전환점 “속도와 보안, 둘 다 가능하다”
R0VM 2.0은 단지 빠르고 안전한 가상 머신을 만든 것이 아니다. 이는 블록체인, 암호기술, 탈중앙화 기술 전반에 걸쳐 ZK가 상용 기술로 자리 잡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신호탄이다. ‘속도냐, 보안이냐’라는 선택지에서 벗어나 ‘둘 다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 R0VM 2.0은, ZK 기술의 실용화 전환점으로 기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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