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도·당도 조화로운 리슬링이 발군
쇼비뇽블랑·샴페인 대체로 조화로워
샤르도네, 간장의 벽 못넘어
[블록미디어=권은중 전문기자] 동양 음식 가운데 와인과 가장 어울리는 음식은 뭐니뭐니해도 일식이다.
한식을 비롯해 중식, 동남아식, 인도식은 기본적 풍미가 매콤함인데 이 맛은 와인과 대척점에 있다. 반면 일식은 매운 맛이 고추냉이나 산초 정도인데 이 정도는 와인의 향과 맛이 충분히 포용할 수 있다. 거기에 일본음식은 주로 짠맛과 단맛으로 승부를 하는데 이는 와인과 가장 잘 매칭되는 맛이다. 일본인들이 일찍부터 와인을 즐기는 와인강국이 된 이유는 이런 일식이 가진 맛의 특징 덕분이 아닐까 싶다.
일식 가운데 가장 대중화된 메뉴 가운데 하나가 초밥과 튀김이다. 튀김은 만국공통 요리니까 서양의 술인 와인과 잘 어울리는 것은 분명하다. 초밥은 1950~1960년대 날 음식이라는 서양인의 삐딱한 시선을 극복하고 ‘세계에서 가장 고급스러운 패스트푸드’라는 독특한 지위를 차지했다.
나도 외식으로 초밥과 튀김을 자주 즐긴다. 그중에 초밥을 특히 좋아한다. 계절별로 바뀌는 생선의 살을 탐하고 또 탐한다. 봄엔 광어 도미 가자미 잿방어 대멸, 가을엔 농어 전어 전갱이 청어, 겨울엔 단새우 방어 삼치 고등어를 즐긴다(여름에는 배탈이 날 수 있어 살짝 건너 뛴다). 계절마다 조금씩 달라지는 생선은 입맛뿐 아니라 삶 자체에 기쁨을 준다. 다시마의 염분으로만 살짝 절인 도미살과 광어살의 감칠맛을 도대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여기에 와인을 곁들이면 천국이 따로 없다. 두 가지 즐거움이 입속에서 만나 입안에서 축제가 펼쳐진다. 잠깐 삶의 무게를 잊어버리는 순간이다. 이 엔돌핀에 중독돼 지금도 한달에 몇번씩 초법과 와인을 즐긴다.
맥주·청주에서 와인으로 돌아선 까닭
그렇지만 30여년 전, 내가 맨 처음 초밥을 먹기 시작할 때 나는 반주로 일본 맥주를 선택했다. 출장으로 일본에 가보니 일본 사람들이 그러고 있었다. 그래서 기린이나 아사히맥주를 초밥과 마셨다. 그러다 일본 청주로 바꿨다. 흰살 생선에는 맥주보다는 깨끗한 청주가 잘 어울리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이었다. 볼락이나 학꽁치같이 여리여리한 생선살에서나는 기분좋은 향기를 맥주는 다 앗아간다(소주를 이런 초밥과 함께 마시는 것은 냉이 된장찌개에 양주를 마시는 것과 비슷한 행동이다).
그런데 청주가 다 옮지는 않았다. 방어나 참치뱃살에는 청주가 맞지 않았다. 살짝 그을린 고등어초밥과 장어초밥에는 맥주가 차라리 나았다. 청주의 효용은 흰살 생선까지라는 것을 깨달았다. 초밥의 꽃인 참치도 청주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초밥을 마실 때 청주를 마시다 어느 순간부터 맥주를 마시는 이상한 패턴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10여년전부터 와인을 마시기 시작한 뒤에는 초밥에는 늘 와인을 마셨다. 청주와 맥주의 단점을 와인이 모두 바로 잡아줬기 때문이었다. 특히 리슬링이 발군이었다. 리슬링은 산도와 당도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뤄 청주와 맥주의 효용을 동시에 줬다. 도미같은 흰살 생선도, 참치같은 붉은 살 생선도, 튀김같은 기름기 있는 뜨거운 음식도 다 어울렸다.
리슬링으로 귀의하기 전까지는 샴페인을 주로 마셨는데 천하의 샴페인에도 단점이 있었다. 탄산 거품이 입안에 남아 있는 기분좋은 초밥의 잔맛을 모두 씻어버렸다. 맛있는 기름기 때문에 즐기는 참치뱃살이나 광어지느러미 초밥은 샴페인과 좋은 궁합이 나올 수가 없었다. 게다가 샴페인은 맨처음 나오는 흰살생선의 하늘하늘함과도 맞지 않았다. 대신 고등어초밥, 장어초밥, 후토마끼 같이 기름기나 향이 강한 초밥과는 궁합이 좋았다. 잊지 말아야할 사소한 기쁨마저도 잊게 만드는 강력한 탄산이 문제였던 것이다.
쇼비뇽 블랑도 내가 초밥과 즐기는 페어링이다. 뉴질랜드 쇼비뇽 블랑은 가격도 합리적이고 향도 좋아서 요즘에도 즐긴다. 그렇지만 초밥에서 중간 단계인 참치뱃살까지는 아주 훌륭하게 커버하는데 불에 구운 장어초밥이나 튀김에서는 다소 힘이 딸린다. 작은 파도까지는 막아내지만 큰 집채 만한 파도는 막지 못하는 작은 방파제를 닮았다. 하지만 그 애를 쓰는 모습이 좋아서 초밥집에 자주 들고 다녔다.
이런 까탈을 부리는 나를 아내는 핀잔을 주었다. 내가 단골 초밥집에 갈 때 아내 눈치를 보면서 와인을 2종류나 챙겼기 때문이었다. 한 병이면 충분한데 괜히 두 병을 챙긴다는 것이었다. 아내가 좋아하는 페어링은 샴페인이었다. 쇼비뇽 블랑도 높은 점수를 줬다. 둘 다 마시기에 목 넘김이 좋은 와인이다.
샤블리, 초밥과는 안 어울려
스페인의 알바리뇨,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재배되는 화이트 품종인 샤도네르(프랑스의 샤블리가 대표적인 샤도네르 와인이다)도 생선과 함께 즐기는 와인이다. 그래서 초밥과 어느 정도는 어울린다. 하지만 둘다 간장과 고추냉이의 벽을 잘 넘기지 못한다. 흰살 생선부터 약간의 불편함이 느껴진다. 샤블리는 명성 때문에 사람들이 초밥집에서 많이 마시지만 개인적으로는 비추천하는 와인이다.
물론 초밥에 꼭 화이트와 스파클링만이 어울리는 것은 아니다. 장난삼아 마셔봤던 차가운 보졸레 누보도 잘 어울렸다. 포도맛 소주와 비슷한 느낌이 들었는데 초밥과 먹으니 꿀떡꿀떡 잘 넘어갔다. 된장 쌈장을 놓고 즐기는 우리나라 전통식 회와도 잘 맞을 것 같은 친화력이었다. 느슨하게 친구들과 즐기는 초밥파티에 한번 도전해보면 좋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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