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록미디어 이건우 객원기자] “겁없는 젊은이들.”

70년대 신생기업의 대명사로 꼽히는 율산그룹은 아직도 많은 이들의 머리속에 “앙팡 테리블”의 기억으로 남아 있다.

율산그룹 흥망사는 단돈 100만원으로 회사를 설립해 4년만에 14개 계열사를 거느린 대그룹으로 성장시킨 20대 청년들의 모험담을 담고 있다. 화려하게 솟아 올랐던 율산의 불꽃은 창업 4년만에 부도라는 비운을 맞아 허망하게 끝을 맺는다.

율산의 성장과 몰락 이면에는 20대 열혈청년들의 패기, 열정과 함께 수출지상주의, 정경유착 등 70년대 한국경제가 안고 있던 고질적인 병폐들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율산은 “70년대 한국경제”가 갖는 특수성 속에서 급성장할 수 있었고, 또 그 틀 속에서 급속히 붕괴했다.

◆ 화려하게 타오른 율산

75년 6월 17일. 신선호 율산 사장(당시 27세)은 자신의 동향 친구 6명과 함께 율산실업을 창업한다. 70년대를 풍미한 이른바 `율산 신화`의 시발점이다.

20대 후반의 `풋나기` 사업가들로 구성된 율산은 젊은 패기와 추진력,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세워 곧바로 재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율산은 창업 초기 중동지역에 대한 시멘트 수출로 기반을 닦았다. 시멘트를 첫 수출하면서 현지 항만사정으로 인해 하역할 수 없게 되자 헬리콥터와 LST(상륙함) 등을 동원해 납기를 맞췄고, 이를 지켜본 중동 바이어들로 부터 절대적인 신임을 얻게 된다. 이후 중동시장은 율산이 신화를 만들어가는 기본 토대로 작용한다.

시멘트 수출에 힘입어 창업 첫 해 340만달러의 수출실적을 올린 율산은 곧바로 신진알미늄을 인수해 재계를 놀라게 한다.

창업 이듬해인 76년에도 율산의 기세는 꺽일줄 몰랐다. 금룡해운과 동원건설을 잇따라 인수한데 이어 4300만달러 수출실적을 기록, 창업 2년만에 동탑산업훈장을 수상했다.

율산은 77년들어 경흥물산 등 5개 회사를 추가로 인수해 사세를 크게 확장했다. 이 해 율산은 전년보다 4배 이상 늘어난 1억6500만달러를 수출해 금탑산업훈장을 받았고, 78년에는 마침내 13번째 종합무역상사로 지정받는다.

창업 초기 시멘트 수출에만 의존했던 율산은 78년말 모기업인 율산실업을 필두로 ▲율산건설 ▲율산알미늄 ▲광성피혁 ▲경흥물산 ▲율산전자 ▲율산해운 ▲율산엔지니어링 ▲율산중공업 ▲서울종합터미널 ▲호텔내장산 ▲율산제화 ▲유신관광 ▲동아공업 등 14개 계열사와 27개 해외지사, 6개 합작법인을 거느린 대그룹으로 성장한다.

외형 확장 못지 않게 기업별 성과도 탄탄했다. 율산은 78년 당시 건설분야에서 해외 공사 수주액 5위, 국내 공사 수주액 20위권을 기록했다. 또 해운업 분야에서는 국내업체 가운데 유일하게 중동지역에 대형화물 정기노선을 운항하는 한편 미국지역 화물선박 부문에서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율산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77년 11월 서울종합터미널(현 반포 고속버스터미널) 부지 1만8700여평을 서울시로부터 사들이는 등 사업범위를 넓혀 갔다. “겁없는 젊은이들”의 기세는 가히 파죽지세였다.

창업 이후 불과 3년여만에 율산은 건설 해운 전자 등 각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명실공히 신흥 재벌그룹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 수출업체 특혜 지원 업고 급성장

율산이 이처럼 급속히 성장할 수 있었던 이면에는 율산맨들의 노력과 집념이 자리하고 있다. 20대 후반의 패기 넘치는 사업가들은 하루하루 일하는 재미에, 무엇인가를 성취해 가는 재미에 빠져 있었고, 회사는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다.

하지만 율산이 급성장한 배경에는 당시 박정희 정권의 수출지상주의 정책이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한 것이 사실이다.

수출입국을 기치로 내걸었던 박 정권은 수출업체들에 대해 제공할 수 있는 최대한의 특혜를 베풀었다. 외국 바이어로부터 신용장만 받아오면 이를 담보로 은행에서 즉시 현금을 인출할 수 있었다. 은행 대출금리가 25%를 넘나들던 시절이었지만 수출기업에게는 연 6% 저리로 대출해줬다. 수출이 곧 ‘애국’이며 수출상사가 하는 일이면 무엇이든 용인해주는 풍토가 자리를 잡았다.

이런 분위기 속에 일부 기업들은 수출을 핑계로 은행돈을 빼내 사채놀이나 부동산 투기에 사용하기도 했다. 수출만 내걸면 안되는 것이 없던 시절이었다.

율산도 이런 흐름을 놓치지 않았다. 저돌적으로 수출에 총력을 쏟아 부었고, 그 과정에서 정부로부터 엄청난 지원을 받았다. 불과 4년만에 14개 회사를 인수 또는 신설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수출상사에 대한 무차별적인 정책대출이 자리잡고 있다.

율산이 급속히 성장하는데 기여했던 이같은 대출지원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율산이 급속히 무너지는 또다른 배경으로 작용한다.

◆ 괴소문에 단자사들 자금회수 나서

잘 나가던 율산그룹에 이상신호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78년 7월경이었다. 단순한 해외사고가 발단이었지만 그 파장은 사채시장을 중심으로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됐다.

사건의 개요는 이렇다.

78년 봄 율산실업이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유통업을 하다가 적발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우디는 외국기업의 도소매업 진출을 법률로 막고 있었는데 율산이 그 규정을 일부 어겼던 것이다. 결국 거액의 벌금을 무는 선에서 사건은 일단락 됐다.

하지만 이 사건이 국내에 알려지면서 파장이 이상하게 전개되기 시작했다. 현지에서 모두 종결된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율산이 조만간 사우디에서 쫓겨날 것”이라는 내용으로 와전돼 국내에 전해진 것이다.

율산이 전략적 요충지인 사우디에서 쫓겨난다는 것은 율산의 뿌리를 뒤흔들만한 중대한 사건이라는게 당시 시장의 반응이었다. 율산측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단자사들은 자금회수에 나섰고, 율산의 자금사정은 점점 빡빡해져 갔다.

이 무렵 발표된 8.8 부동산투기억제 조치도 율산에게는 악재였다. 부동산 열기가 급속히 냉각되면서 율산건설이 분양중이던 소라아파트가 팔리질 않았다. 주력계열인 율산건설의 자금운용에 빨간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9월들어 율산은 주거래은행인 서울신탁은행에 자금지원을 요청해야 할 정도로 자금사정이 악화됐다. 율산의 자금지원 요청을 받은 홍윤섭 당시 서울신탁은행장은 제일 조흥 한일은행 등 율산 관련 은행장들과 모임을 갖고 두 차례에 걸쳐 총 70억원의 긴급 구제금융을 지원키로 결정한다. 하지만 이 돈은 지원과 동시에 곧바로 단자사 빚을 갚는데 소진되어 버려 율산의 자금난 해소에는 도움을 주지 못했다.

구제금융이 별반 효력을 보지 못하자 채권은행들은 79년 2월 20일 공동감리단을 구성, 사실상 율산에 대한 은행관리에 들어가게 된다. 이후 율산의 상황은 급속도록 악화됐다.

4월 3일 신 사장이 업무상 횡령 및 외환관리법 위반 등의 혐의로 구속 수감됐고, 사흘 후인 4월 6일 마침내 율산그룹 전 계열사가 일괄 부도처리됐다. 화려하게 치솟아 올랐던 율산의 불꽃은 사라지는 과정도 속전속결이었다.

◆ 차입경영과 자금관리 부재가 원인

파죽지세로 질주하던 율산이 이처럼 자금난에 봉착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자기자본의 뒷받침 없이 무리하게 은행돈을 끌어다 사업을 확장한 것이 주요인이었다.

율산이 잘 나가던 때인 77년말 현재 율산실업의 자기자본은 12억원, 부채는 313억원을 넘어서 부채비율이 2600%에 달했다. 계열사인 율산건설의 부채비율은 676%, 율산알미늄은 470%에 달하는 등 모기업과 방계기업의 재무구조가 극히 취약한 상태였다.

79년 4월 검찰이 신 사장을 구속하면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당시 율산의 자본금은 98억원인 반면 은행부채가 1523억원에 달해 은행빚이 자본의 15배를 넘어서고 있었다. 전적으로 은행돈에 의존해 그룹 외형을 부풀려 왔음을 보여준다.

무리한 기업확장과 함께 회사내 자금관리 능력이 미비했다는 것도 율산의 약점이었다.

부도 후 율산 회장 자격으로 사태수습에 나섰던 진의종 전 국무총리는 “단기자금으로 장기 고정투자를 했기 때문에 이 지경이 됐다”며 율산의 허술한 자금관리 실태를 지적했다.

실제로 당시 율산이 은행으로부터 빌려온 돈은 대부분 수출지원금융 등 단기대출이 주종을 이뤘고, 국민투자기금 등 장기대출 자금은 일부에 불과했다. 단기자금을 빌려 장기 고정자산에 묶어 놓음으로써 운전자금 부족시 곧바로 자금난에 빠질 수 밖에 없는 구조였다.

그룹의 자금수급 계획도 엉성하기 짝이 없었다. 자금난으로 주거래은행에 구제금융을 요청하기 직전인 78년 8월 율산은 어찌된 영문인지 잠실쇼핑센터 부지를 매입키로 서울시와 계약을 체결한다. 불과 한 두달 앞의 자금수급 조차 예측하지 못할 정도로 율산의 자금관리는 엉성했다.

◆ “억울하게 당했다”…정치적 타살설 제기

하지만 이 같은 현상은 당시 율산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었다. 당시 종합무역상사들의 부채비율은 평균 488%에 달했다. 은행돈을 최대한 많이 빌려 기업을 하나라도 더 늘리는 것이 당시 통용되던 경영기법이었고, 많은 수출기업들이 이와 유사한 행태를 보이고 있었다.

이 같은 정황에 빗대어 “율산 부도에는 경제외적인 다른 요인이 작용했다”는게 당시 율산측의 주장이었다. 자금관리능력 부족이 부도 요인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 보다 궁극적인 원인은 예기치 못한 곳에서 발생한 모종의 사건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와관련 재계 일부에서는 ‘정치적 타살설’을 제기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율산을 부도로 내몬 얘기치 못한 사건이란 무엇일까.

당시를 기억하는 재계 관계자들은 79년 1월 25일 발생한 ‘신선호 사장 납치기도 사건’을 그 요인으로 꼽는다. 확실한 물증을 제시하긴 어렵지만 이 사건이 율산 부도와 어떻게든 연관되었을 것이라는 게 당시 재계의 평가였다.

특히 이 사건이 일어난 시점과 율산이 정부 및 금융당국으로 부터 갑자기 냉대를 받기 시작한 시점이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가깝게 일치하고 있다는 점 등이 의혹을 증폭시켰다. 율산의 주장대로라면 모종의 거대한 권력이 이 사건 직후 율산의 구제노력에 제동을 걸기 시작했고, 그 결과 율산이 급속도로 부도 수순을 밟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정황은 사건이 발생한 1월 25일 이후의 율산처리 과정을 살펴보면 좀 더 선명해진다.

2월 7일까지만 해도 정부는 율산의 재무구조 개선을 위해 채권은행단을 통해 30억원의 단기구제금융과 60억원의 긴급운전자금을 지원해주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었다.율산 입장에서는 이 같은 채권단의 구제방안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고, 이를 통해 당장의 자금난만 해소되면 빠른 시일내에 그룹을 정상화시킬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그러나 상황은 정반대로 전개됐다. 정부 내부에서 진지하게 검토되던 긴급운전자금 지원 방안이 갑자기 백지화되어 버린 것이다. 당시 실권자인 청와대 고위당국자가 율산 지원에 냉담한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라는 설이 파다하게 퍼졌다.

탈출구가 봉쇄된 율산은 이후 급속도로 파국을 향해 치달았고, 두 달이 채 못돼 `계열사 일괄 부도`라는 최악의 수순을 밟게 된다.

◆ 납치사건의 전말

율산 부도는 결국 정부와 채권단 내에서 추진했던 ‘재무구조개선방안’이 갑자기 무산된데서 부터 비롯되었다는게 당시 재계의 평가다.

그렇다면 누가, 왜 율산 재무구조개선방안을 무산시킨 것일까.

이에 대한 해답을 추론하기 위해서는 79년 1월 25일 발생한 신선호 사장 납치기도 사건의 전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신 사장이 밝힌 내용을 근거로 당시 사건을 정리하면 대략 이렇다.

“1월 25일 오후 1시. 신선호 사장은 중구 태평로 동방빌딩 7층 율산실업 사장실에서 괴청년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는다. 괴청년은 “청와대 비서실인데 윗선(실장님)에서 보자고 하신다. 할 얘기가 있으니 오후 2시 30분까지 경제기획원 앞으로 나오기 바란다”라는 말을 남기고는 전화를 끊었다.

일방적인 전화를 받은 신 사장은 막막한 심정이었지만 그렇다고 안 나갈 수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재계에는 청와대 비서실에서 은밀히 재벌그룹들에 대한 내사를 벌이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던 터라 비서실장을 내세운 전화를 무조건 무시할 수만도 없는 처지였다.

약속시간 5분전인 오후 2시 25분 경제기획원 앞에 도착해 2~3분 정도 기다리니 청년 2명이 다가와 “신 사장이냐”고 묻고는 함께 가자고 했다. 이들은 신 사장의 운전사를 내리게 한 뒤 직접 차를 몰아 삼청동 총리 공관 앞에서 점퍼 차림의 20대 청년을 한 명 더 태운 뒤 삼청터널로 들어섰다.

차량이 청와대 비서실쪽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이동하자 신 사장은 뭔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했다. “어디로 가느냐”고 묻자 일행 중 한 명이 “뻔한 것 아니냐. 경기도 여주 근처 조용한 곳에 가서 얘기하자”면서 신 사장의 두 팔을 양쪽으로 끼고 꼼짝 못하게 했다.

차는 제3한강교를 거쳐 경부고속도로에 진입, 양재동 톨게이트에 이르러 표를 사기 위해 정차했다. 이 순간 신 사장이 “사람살려”라고 외치면서 발버둥치자 매표원이 다가왔고 이들이 당황하는 사이 신 사장은 뒷문을 열고 탈출에 성공한다. 범인들은 그대로 하행선으로 달아났고, 신 사장은 톨게이트 사무실로 대피해 회사 차량을 불러 귀가했다.”

대낮 납치극에서 탈출한 신 사장은 자신의 집무실에서 기자들과 만나 사건의 전모를 소상하게 밝혔다.

“전화만 받고 어떻게 순순히 약속장소에 나갈 수 있었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신 사장은 “범인들의 전화 목소리가 정중하고 청와대 비서실을 사칭하는데다, 도심의 경제기획원에서 만나자고 해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고 답했다.

실제로 사건 며칠 후 범인 3명이 모두 붙잡혔는데 이들은 돈을 노리고 청와대 비서실을 사칭한 것으로 드러났다.

◆ “건방진 아이들 때문에 내가 당한다”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불거졌다. 다음날 각 신문들은 신 사장 피납사실을 대서특필하면서 신 사장이 언급한 청와대 비서실을 그대로 활자화해 버렸고, 이 보도를 접한 청와대 비서실장 K씨가 대노하는 사태로 비화한 것이다.

비서실장으로 갓 부임한 K씨는 당시 기업인들과 연쇄 접촉을 갖고 있었고, 이 과정에서 좋지 않은 소문이 나돌던 터였다. 이런 시점에 신 사장이 청와대 비서실과 비서실장을 거명하자 크게 노했다는 것이다. K씨는 “건방진 아이들 때문에 내가 당한다”며 격노했고, 그렇지 않아도 자금사정이 어려웠던 율산에 칼을 들이대는 계기가 되지 않았겠느냐는게 당시 사건에 대한 재계의 관측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재계 중진은 “어쨌든 신 사장이 청와대 비서실을 거명한 것 자체가 결정적 실수였다”고 회고했다.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이었던 서석준 전 부총리(아웅산 폭발사건으로 사망)는 후일 율산 부도와 관련해 재계 인사들에게 “참 억울하게 당했다”고 언급한 것으로 전해진다. 율산 처리과정에 정치적 판단이 개입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어쨌거나 이 사건 이후 율산의 상황은 급전직하로 추락한다. 채권단의 재무구조개선방안이 갑자기 백지화됐고, 은행감리가 시작된데 이어 사건 발생 후 두 달여만에 전 계열사 일괄 부도로 이어졌다.

◆ 정경유착의 시작과 끝

75년 혜성같이 등장했다가 4년만에 사라져 버린 율산그룹의 흥망은 70년대 한국 경제의 허실을 여과없이 보여준다.

수출기업들에게 은행돈을 마구 퍼주었던 특혜금융과 이를 토대로 `모래성`을 쌓았던 당시 기업들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다. 또 정권 실세의 입김에 따라 기업의 존망이 오락가락하던 후진국형 기업시스템도 그대로 드러난다. 정경유착의 시작과 끝이 무엇인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79년 그룹부도 후 외부와 연락을 두절했던 신선호 사장은 2000년 7월 서울종합터미널 부지 1만8천평에 센트럴시티를 지으면서 재계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서울종합터미널 부지는 76년 서울시가 율산에 매각하면서 “고속버스터미널 완공시 소유권이전 등기를 필해주겠다”며 제3자 양도를 원천 금지해 놓은 땅이었고, 그 덕에 부도 이후에도 채권단에 넘어가지 않은 율산의 마지막 남은 자산이었다.

신 사장은 센트럴시티를 재기의 발판으로 삼고자 절치부심했지만, 영업부진으로 1년만에 경영권과 보유지분을 매각하는 등 또 한번의 좌절을 겪는다.

율산의 성장과 부도, 그리고 이어지는 재기와 좌절의 과정은 근대 한국기업 성장사의 단면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