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록미디어 이건우 객원기자] “여보게, 이거 어디 되겠는가?”

1968년 11월. 모래바람 부는 황량한 포항제철 건설 현장을 바라보며 박정희 대통령이 내뱉은 한마디다.

당시 옆에 있던 박태준 포철 사장은 가슴이 철렁했다고 한다. 박 사장은 후일 한 월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이 양반이 날더러 모래속에 파묻혀 죽으라는 말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회고했다.

경부고속도로와 함께 한국 경제성장의 양대 기둥 역할을 하는 ‘포항제철’ 신화는 이렇게 영일만 허허벌판의 모래바람 속에서 시작한다.

◆ 출발 부터 삐걱거린 제철소 건설 

우리나라 최초의 제철소는 1918년 일제가 황해도에 세운 김이포제철소가 그 시초다. 이후 1942년 청진제철소 등 여러 개의 군소 제철공장들이 건설됐지만 대부분 군수용 제품을 생산했으며, 일제의 태평양전쟁 조달 목적으로 활용됐다.

제철 관련 주요시설들은 대부분 북한에 있었고, 그나마 남쪽에 있던 일부 시설들은 6.25때 모두 파괴되어 버렸다. 남한에는 철강산업이 사실상 전무한 실정이었다. 전후복구 사업으로 인해 철강재 수요가 급증하자 이승만 정부는 종합제철소 건설을 위한 여러 계획들을 시도했지만 재원과 기술부족으로 번번히 실패하고 말았다.

제철소 건설이 실현가능성 있는 정책으로 구체화되기 시작한 것은 경제기획원이 출범하면서 부터다. 65년 7월 경제기획원이 입안한 ‘종합제철소 건설계획안’이 경제장관회의를 통과하면서 비로소 “제철입국”을 향한 구체적인 행보가 시작된다.

경제기획원은 연산 100만톤 규모의 제철소를 건설하되 자금부담을 고려해 1기 50만톤, 2기 50만톤 규모로 나누어 건설하는 방안을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관건은 자금조달이었다. 제철산업 전망이 극히 불투명하다는 국내외의 반대여론을 극복하고 어떻게 건설자금을 조달할 수 있을지가 과제였다.

정부 차원에서 차관교섭에 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 같은 정부의 노력에 힘입어 66년 12월 6일 미국 제철설비 회사인 코퍼스사를 중심으로 ‘KISA(Korea International Steel Associates, 대한 국제제철 차관단)’이 발족했다.

이 컨소시엄에는 서독의 지멘스, 영국의 웰먼, 이탈리아의 임피안티 등 5개국 8개 제철관련 회사들이 참여했다. KISA에 참여한 업체들은 한국에 제철소 건립을 위한 차관을 주선해 주는 대신 종합제철 건설에 필요한 설비를 한국에 판매하겠다는 목적을 갖고 있었다. 상업적 이해를 전제로 구성된 조직이다 보니 참여사간에 의견이 엇갈리는 등 출발부터 삐걱거리는 모습을 보였다.

◆ 국영기업 아닌 ‘주식회사‘ 형태로 출범

67년 10월 3일 포항시 교외 영일군 대송면에서 포항종합제철(현 포스코) 기공식이 거행됐다. 황량한 모래벌판을 세계 굴지의 제철공업단지로 탈바꿈시키는 ‘영일만 드라마’의 제1막이 오른 것이다.

이듬해인 68년 3월 20일 포항제철은 창립총회를 열고 재무부와 대한중석이 각각 3억원과 1억원을 자본금으로 출자, 상법상의 주식회사로 공식 출범했다. 창설 요원은 박태준 사장 등 임원 8명과 직원 31명으로 구성됐다. 직원중에는 후일 포철 회장이 된 황경노씨와 상공부장관이 된 안병화씨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설립자금이 국고에서 지원됐음에도 포철이 국영기업이 아닌 주식회사 형태로 출범하게 된 것은 박태준 사장의 강력한 요청 때문이었다. 국영기업으로 출범할 경우 설비구매 등 사소한 일까지 정부의 심의를 거쳐야 하는 만큼 소신있는 경영이 곤란해진다는게 박 사장의 주장이었다. 박 대통령이 이 같은 박 사장의 요청을 받아들이면서 포철은 국영기업이 아닌 상법상의 주식회사로 출범하게 된다. 박태준 사장에 대한 대통령의 신뢰가 어느 정도였는 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박정희 대통령과 박태준 사장간의 인연은 해방 직후인 194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 와세다大 기계공학부를 마치고 귀국한 박 사장은 48년 봄 육사 6기로 입학했고, 이곳에서 박정희를 만난다. 박정희는 당시 육사 1중대장으로 탄도학 등을 가르쳤는데 교관들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인물이었다는게 박 사장의 회고다. 박 사장은 5.16이 일어나자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비서실장을 맡게 된다. 그 후 상공담당 최고위원으로 임명돼 경제개발계획 기초작업을 수행하다 63년 소장으로 예편했다.

군복을 벗은 그에게 박 대통령은 한일관계 정상화를 위한 밀사 역할을 맡으라는 새로운 임무를 부여했다. 이후 박태준은 8개월여간 일본에 머물면서 양국 관계정상화를 위한 물밑작업을 진행했다. 이 때 만난 일본의 정재계 인사들이 후일 포항제철 건설에 커다란 도움을 주게 된다.

◆ 수포로 돌아간 KISA 차관도입 계획

회사 창립 후 두 달만에 제철소 부지 232만평에 대한 매수가 마무리되고 본격적인 부지조성 작업에 착수했다. 하지만 그 때 까지도 차관이 확보되지 않아 제철소 건설이 성공적으로 진행될 수 있을 지 여부는 불투명한 상태였다. 소요외자 1억900만달러 가운데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3국의 4300만달러만 확정되고 나머지 6600만달러는 미확정 상태였다.

외자조달이 난항을 겪게 된 주된 원인은 미국의 소극적 태도 때문이었다. 미국은 제철소를 비롯한 한국의 투자 우선순위 책정에 경제적 타당성이 없다는 이유를 들어 자금지원에 난색을 표했다. 박 대통령이 건설공사 현장을 찾아 “이거 어디 되겠는가?”라며 박태준 사장에게 우려의 뜻을 표한 것도 이런 상황을 반영한 것이었다.

밤낮 없이 부지조성 작업이 진행되던 69년 3월 IBRD 조사단은 한국의 제철소 건설에 대해 극히 부정적인 내용의 보고서를 작성해 정부에 제출했다. “한국경제의 외채상환 능력과 산업구조 등을 감안할 때 일관제철소 건설은 타당성이 없고 시기상조”라는 게 골자였다. 제철소 건설 보다는 차라리 미국이나 일본으로 부터 철강재를 수입해서 쓰는 것이 타당하다는 주장이었다.

국제기구의 이 같은 부정적 보고서로 인해 외자조달 여건은 더욱 악화됐다. 정부는 박충훈 부총리를 워싱턴에 급파하는 등 막바지 차관 교섭에 총력을 기울였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69년 4월 29일 미국 수출입은행 컨스 총재는 박 부총리에게 “제철소 건설용 차관을 줄 수 없다”는 최종 입장을 통보한다. KISA를 통해 제철소 건설용 차관을 조달하려던 정부의 4년여에 걸친 노력은 결국 수포로 돌아갔다.

◆ “KISA 안대로 추진했다면 부실기업 됐을 것”

KISA가 와해되자 박정희는 중대 결정을 내렸다. 69년 5월 22일 박 대통령은 청와대에 박충훈 부총리, 김정렴 상공장관, 박태준 포철 사장 등을 불러 제철소 건설과 관련한 방향전환을 지시한다. “종합제철소 건설 계획을 외국기관에게 일임한 채 결과만 기다리는 태도를 버리고, 우리 자체의 안을 만들어 외국투자기관을 설득하라”는 것이었다. 국가 중대사안의 성패를 외국기관 결정에 맡겨두는 수동적 자세에서 벗어나 현실성 있는 독자개발 방안을 마련하라는 특명이었다.

박 대통령은 이로부터 열흘 후 박충훈 부총리를 경질하고 김학렬 경제수석을 후임 부총리로 임명하는 개각을 단행했다. 추진력 강하고 개성이 뚜렷한 김 부총리를 내세워 포항제철 건설에 힘을 쏟겠다는 통치권자의 의지 표현이었다.

김 부총리가 취임하면서 곧바로 경제기획원 내에 “종합제철사업계획 연구위원회”가 구성됐다. 위원장은 정문도 기획원 운영차관보가 맡았으며,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김재관 박사 등 13명의 철강전문가들이 위원으로 참여했다.

위원회는 한 달 반에 걸친 연구작업을 거쳐 7월 22일 255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보고서를 작성해 청와대에 제출했다. 보고서는 연 100만톤 규모의 조강 생산능력을 갖춘 종합제철 공장을 72년까지 완공하고, 이를 최단 시간내에 200만톤 규모로 늘린 다음 최종적으로 연산 500만톤 규모의 대단위 제철소로 확장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포항제철 건설은 KISA와 결별하고 독자 건설방안을 만들면서 부터 구체화되기 시작한다. 오원철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은 “KISA안대로 추진했더라면 포항제철은 결국 부실기업이 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회고했다. 설비 수출에만 관심을 갖고 있던 KISA 참가업체들이 한국 상황을 도외시한 채 구상한 연산 60만톤 규모의 제철소로는 채산성을 맞추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 “대일청구권 자금을 활용하라”

KISA를 통한 차관공여가 실패하면서 새로운 대안으로 부상한 것이 일본 자금을 활용하는 방안이었다. 당시 일본이 한국에 주기로 한 대일청구권 자금이 있었는데 이 중 농림수산 분야 자금을 제철소 건설 자금으로 전용하자는 발상이었다.

대일청구권 자금 전용 아이디어는 박태준 사장이 처음 제기한 것으로 포철 20년사는 기록하고 있다. 외자도입을 위해 미국 코퍼스사를 방문했다가 절망적인 답변을 받고 귀국길에 오른 박 사장이 ‘대일자금 전용’ 아이디어를 떠올리고는 곧바로 일본으로 날아갔다는 것이다.

동경에 도착한 박 사장은 일본 철강연맹 이사장인 이나야마 야하다제철 사장과 나가노 후지제철 사장 등 일본 제철업계 관계자들을 만나 한국 제철소 건설에 협조해 줄 것을 부탁했다. 귀국 후 박 사장은 대통령을 만나 이 같은 상황을 보고했다. “KISA를 통한 차관도입 계획은 실패로 끝났다. 대안은 대일청구권 자금을 전용하는 길 밖에 없다.”

이후 제철소 건설을 위한 자금조달 및 차관교섭 대상은 일본으로 바뀌었다. 그동안 미국의 냉담한 반응으로 의기소침해 있던 정부 관료들도 다시 팔을 걷어부치고 나섰다. 일본에 대한 설득 작전은 두 갈래로 진행됐다. 일본 재계와 철강업계는 박태준 포철 사장이 맡고, 일본 정부와의 합의 도출은 김학렬 부총리가 담당하는 방식이었다.

처음에 일본 정부는 청구권자금 전용에 대해 경제적 타당성과 재정상태 등을 이유로 난색을 표시했다. 특히 통산성은 한국에 제철소를 건설할 경우 향후 자국과 경쟁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려를 감추지 않았다.

69년 8월 6일 박태준 사장은 정문도 기획원 차관보와 함께 실무교섭단을 이끌고 다시 일본 방문길에 올랐다. 민관합동으로 일본 설득에 나선 것이다.

“일본은 청일전쟁 후 군비의 기초를 확립하고자 12만톤 규모의 야하다 제철소를 건설할 당시 채산성을 문제삼지 않았다. 일본은 1인당 국민소득 50~60달러일 때 제철소를 시작했는데 한국은 지금 200달러에 육박하니 못할 것도 없다.” 교섭단은 일본 정계와 재계의 실력자들을 만나 집요하게 설득했다.

마침내 일본 정부는 8월 22일 각의를 소집하고 26일 개막되는 한일 각료회담에서 한국의 종합제철 건설에 협력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민관 합동 설득작전이 성과를 거둔 것이다.

그 해 12월 김학렬 부총리와 주한 일본대사간에 종합제철 건설을 위한 한일 기본협약이 체결됐다. 내외자 2억달러를 들여 103만톤 규모의 종합제철소를 건설하며, 외자 1억2370만달러 중 청구권 자금으로 7370만달러, 일본 수출입은행 차관으로 5000만달러를 각각 조달한다는 내용이었다.

해방 이후 번번히 실패해 온 제철소 건설 사업이 다섯번째 시도 끝에 결국 일본자금 유치로 해법을 찾은 것이다. 자금확보 미비로 지지부진했던 포항제철 건설 작업은 다시금 탄력을 받기 시작한다.

◆ “신기루가 현실로…“

70년 4월 1일 마침내 포항제철 1기 설비가 착공되고, 3년 후인 73년 6월 9일 첫 화입식(火入式)이 거행됐다. 우리나라 최초로 만든 용광로에서 시뻘건 쇳물이 쏟아져 나오는 장면은 말 그대로 장관이었다.

이후 제선 제강 압연 등 총 22개 공장 및 설비로 구성된 종합제철 일관 공정을 모두 마무리하고 73년 7월 3일 마침내 포철 1기 설비가 종합 준공됐다. 무자본, 무경험, 무기술 상태에서 허허벌판을 현대식 제철공장으로 탈바꿈시킨 “영일만 신화”였다. 연인원 581만명이 동원됐고, 건설자금은 경부고속도로의 3배가 넘는 1205억원이 투입됐다.

“신기루가 현실로 승화한 것이 포항종합제철이다.” 정문도 당시 기획원 차관보(포철 건설추진위원장)는 포철 건설의 감회를 이렇게 표현했다. 건설자금 조달을 위해 미국과 일본을 오가며 애간장을 녹이던 차관교섭단의 일원으로서, 허허벌판에 모습을 드러낸 포항제철의 위용은 마치 신기루처럼 보였을 법도 하다.

포철 건설 당시 직원들 사이에는 이른바 ‘우향우 정신’이 주입되어 있었다고 한다. 만약 실패하는 날에는 모두 우향우 해서 영일만 앞바다에 빠져 죽을 각오로 일하자는 것이었다. “민족의 목숨 값이라 할 수 있는 대일청구권 자금이 건설재원인 만큼 실패하면 사표가 아니라 죽음으로 사죄한다”는 각오였다.

이 같은 각오로 뭉친 초기 경영진과 근로자들의 사명감은 오늘날 포철을 세계 최고 기업으로 성장시키는 밑거름이 됐다. 포철은 이후 포항제철소 2~4기, 광양제철소 1~4기, 광양 5고로 증설 등 끊임없이 설비를 확장하며, 한국을 세계 굴지의 철강대국으로 끌어올리는 견인차 역할을 담당한다. 포철은 그 자체로 한국 경제개발의 초석이자 동시에 금자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