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록미디어 명정선 기자]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경기동향 보고서 ‘베이지북’은 인플레이션이 다시 불붙으면서 미 서민 가계가 무너지는 ‘K자형 분열’을 선명하게 드러냈다. 알파벳 K의 윗날처럼 고소득층은 물가가 올라도 부담없이 지갑을 열고 있지만, 아랫날에 속한 중·저소득층은 가계 재정이 한계에 다다르자 먹고 입는 필수 소비마저 쥐어짜는 상반된 길을 걷고 있다는 진단이다.
실실적인 현장의 비명은 연준의 공식 발표에서도 고스란히 묻어났다. 연준은 3일(현지시각) 발표한 5월 베이지북을 통해 “고소득 가구는 여전히 가격 인상에 둔감하며 소비 복원력을 유지하고 있다”고 평했다. 반면 중간 소득 가구에 대해서는 “1달러를 지출하기 전에 한 방울의 가치까지 쥐어짜는(Squeezing more life)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묘사했으며, 저소득 가구는 이미 극심한 재정적 한계 상황에 직면했다고 분석했다.
베이지북은 미국 12개 연방준비은행 관할 지역의 기업인과 경제학자 등 현장 목소리를 취합한 보고서로, 오는 17일 열릴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정례회의에서 기준금리를 결정할 때 기초 자료로 쓰인다.
중동 전쟁이 밀어 올린 물가… ‘유가·관세’ 전방위 확산
이번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 전역의 물가는 지난달보다 ‘완만하거나 강한(moderate to strong)’ 속도로 상승했다. 특히 대부분의 연준 관할 지역에서 5월 인플레이션 압력이 지난 4월보다 가팔라졌다고 보고했다.
물가를 다시 자극하고 있는 주범은 이란 전쟁 등 중동 지역의 군사적 갈등으로 인한 에너지 가격 폭등이다. 급등한 유가는 단순히 주유소 기름값에 그치지 않고 배송비(물류), 포장재, 식료품, 비료 가격 등 경제 전반으로 빠르게 전이되고 있다.
이로 인해 미 전역에서 신용카드 사용량이 급증하고 있으며, 백화점 등 소매점 방문 횟수는 눈에 띄게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소비자들이 지갑을 닫는 대신 철저히 생필품 위주로만 소비를 이어가고 있는 점도 가계가 직면한 압박을 보여준다.
“원가는 오르는데 가격 못 올려”… 기업들도 비명
물가 상승은 소비자뿐만 아니라 기업들에도 심각한 타격을 주고 있다. 중동발 물류비와 원자재 비용 등 기업들의 ‘투입 원가’는 빠르게 치솟고 있는 반면, 얼어붙은 소비 심리 탓에 이를 최종 제품 판매 가격에 온전히 전가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고서는 “비용 상승분을 소비자에게 전가할 수 있는 능력은 업종별로 극명한 차이를 보였다”며 “특히 소비자를 직접 상대하는 대면 기업들의 경우 원가 상승률보다 판매가 상승률이 뒤처지면서 이익 마진이 대폭 축소될 것이라는 우려가 깊어지고 있다”고 전했다.
실제로 유가 상승의 수혜를 입을 것으로 예상됐던 에너지 기업들조차 향후 경기 전망이 극도로 불투명해지자 신규 설비 투자나 원유 증산 등 물질적인 사업 확장을 전면 보류하고 관망세에 돌입한 상태다.
2주 앞으로 다가온 FOMC… 연준의 고심 깊어진다
이번 베이지북 결과는 2주 뒤 금리 결정을 앞둔 연준 위원들의 고심을 더욱 깊게 만들 것으로 보인다. 경기 전반에 둔화 징후(소비 감소, 마진 압박)가 완연함에도 불구하고, 에너지발 공급 측면의 충격으로 인해 물가는 오히려 다시 튀어 오르는 ‘스태그플레이션(경기 침체 속 물가 상승)’성 신호가 잡히고 있기 때문이다.
월가 금융 시장 전문가들은 “미국 경제를 지탱하던 소비 엔진이 고소득층의 소비에만 의존하는 기형적인 형태로 변하고 있다”며 “연준이 고물가를 잡기 위해 금리를 동결하거나 인상 카드를 만지작거릴 경우, 이미 한계에 다다른 저소득층과 한계 기업들의 부도 위험이 급격히 커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옥스퍼드 이코노믹스의 낸시 반덴 하우텐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보고서를 통해 “이번 베이지북은 미국 경제가 중동 전쟁발 물가 충격에 심각한 골병이 들고 있음을 보여준다”며 “AI 데이터 센터 투자의 낙수효과 덕에 올해 미국이 2% 안팎의 턱걸이 성장은 유지하겠지만, 중·저소득층 가계가 느끼는 체감 경기는 이미 한계점을 넘어섰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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