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록미디어 명정선 기자] 전 세계 채권시장이 요동치고 있다. 전쟁으로 인한 인플레이션 우려와 주요국 정부의 방만한 지출 확대 압박이 맞물리면서 정부의 차입 비용을 뜻하는 국채 금리가 수년 만에 최고치로 치솟은 것이다.
18일(현지시각) 블룸버그 등 주요 외신과 글로벌 금융시장에 따르면 미국의 30년 만기 국채 금리는 2023년 이후 최고 수준에 근접했고, 일본의 30년물 국채 금리는 27년 발행 역사상 전례 없는 수준까지 급등했다. 영국의 장기 국채 금리 역시 1998년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을 기록 중이다.
국채 금리 급등은 기업 대출, 신용카드, 주택담보대출 등의 금리를 일제히 밀어 올려 실물 경제에 직접적인 타격을 준다. 그간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던 글로벌 증시마저 이로 인해 흔들리기 시작하자 투자자들의 고심도 깊어지고 있다.
슬록 아폴로 운용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고금리가 예상보다 더 오래 지속될 것인 만큼 투자자들도 이에 맞춰 전략을 짜야 한다”고 경고했다. 시장 전문가들은 글로벌 투자자들이 국채를 대거 매도하며 시장을 이탈하는 이유를 다섯 가지로 분석하고 있다.
미·이란 전쟁 장기화에 유가 고공행진… 인플레 부채질
가장 큰 원인은 고삐 풀린 인플레이션이다. 채권은 만기까지 고정된 이자를 지급하기 때문에 인플레이션에 가장 취약한 자산이다. 물가가 오르면 미래에 받을 이자와 원금의 실질 가치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올해 초부터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던 글로벌 물가는 약 3개월째 이어지고 있는 미국과 이란의 전쟁으로 고삐가 풀렸다. 글로벌 에너지 공급의 핵심 요충지인 호르무즈 해협이 사실상 봉쇄되면서 브렌트유는 배럴당 110달러선에서 고착화됐다.
높은 유가는 소비자들의 지갑을 직격했고, 기업들이 생산 비용 상승분을 제품 가격에 전가하면서 전반적인 물가 상승 악순환 우려가 커졌다. 실제로 최근 발표된 미국의 소비자물가(CPI)와 생산자물가(PPI) 상승률은 각각 2023년, 2022년 이후 최대 폭을 기록하며 인플레이션 공포를 자극했다.
AI 투자 열풍이 불러온 ‘칩플레이션(Chipflation)’
인공지능(AI) 투자 붐은 장기적으로 생산성을 높여 물가를 안정시키는 데 기여할 수 있지만, 단기적으로는 심각한 부작용을 낳고 있다. 반도체 칩 수요가 폭발하면서 가격이 급등했고, 이는 반도체를 필두로 하는 가전제품, 자동차 등 전방 산업 전반의 제품 가격 상승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른바 ‘칩플레이션(반도체+인플레이션)’ 현상이다.
이미 HP, 닌텐도 같은 글로벌 IT·엔터테인먼트 기업들이 반도체 비용 상승에 따른 실적 압박을 호소하고 있다. 에드 야데니 야데니 리서치 대표는 “빅테크 기업들이 데이터 센터에 천문학적인 자금을 쏟아붓고 있어 원자재에 대한 비탄력적 수요가 창출되고 있으며, 이는 전력망 과부하와 비용 상승으로 직결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포퓰리즘’에 멍드는 재정… 눈덩이처럼 불어난 각국 빚더미
정치권의 포퓰리즘 행보로 인한 재정 악화도 채권 매도를 부추긴다. 워싱턴부터 도쿄까지, 전 세계 정치인들은 표심을 의식해 지출 확대와 감세를 남발하고 있다. 이미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동안 막대한 빚을 진 상태라 주요국의 재정 지속 가능성에 대한 의문이 커진 상황이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전 세계 공공부채가 지난해 국내총생산(GDP) 대비 95%에서 오는 2029년 100%에 도달할 것으로 추정했다. 미국의 경우, 미 의회예산처(CBO)가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감세 정책으로 인해 10년 뒤 국가부채 비율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기록을 넘어선 120%에 달할 것으로 경고했다.
정부 지출이 늘어나거나 세수가 줄어들수록 국채 발행량은 늘어날 수밖에 없다. 재정 악화를 우려하는 투자자들은 국채 매입의 대가로 더 높은 금리(위험 프리미엄)를 요구하게 된다. 과거 시장을 흔들었던 ‘채권 자경단(Bond Vigilantes, 정부의 방만한 재정 정책에 반발해 채권을 던져 금리를 올리는 투자자들)’이 다시 등판했다는 진단이 나오는 이유다.
“금리 인하는 없다”… 고금리 장기화 전망 우세
상황이 이렇다 보니 중앙은행들이 인플레이션 파이터로서의 주도권을 잃고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불과 지난 2월 말까지만 해도 시장은 올해 두 차례 금리 인하를 예상했으나, 이제 트레이더들은 2027년 3월까지 오히려 추가 금리 인상이 단행될 가능성에 베팅하고 있다.
오는 6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를 앞두고 연준이 통화 완화 편향을 버려야 한다는 압박이 커지고 있으며, 일본은행(BOJ) 역시 금리 인상 요구를 강하게 받고 있다. 여기에 과거 금융위기와 팬데믹 당시 국채를 대거 사들이며 금리를 억누르고 유동성을 공급했던 중앙은행들이 양적건축(QT) 등을 통해 채권 보유량을 줄이고 있는 점도 채권 수요를 위축시키는 요인이다.
견고한 美 경제와 구조적 변화
아이러니하게도 미국 경제의 강한 성장세도 인플레이션을 더욱 자극하고 있다. 최근 데이터에 따르면 미국의 고용 시장은 2024년 이후 가장 강력한 2달 연속 증가세를 기록했다. 시티그룹의 경제서프라이즈지수 역시 지난 4월 기록한 올해 최저치에서 벗어나 반등 중이다. 반면 유럽은 성장은 정체되고 물가만 오르는 ‘스태그플레이션’ 조짐을 보이고 있어 채권 시장에 또 다른 악재로 작용하고 있다.
장기적인 구조적 변화 역시 채권 금리를 밀어 올리는 요인이다. 알리안츠 그룹의 루도빅 수브란 수석 이코노미스트 연구팀은 국가 부채(Debt)와 AI로 인한 디지털화(Digitalization) 외에 채권시장을 뒤흔드는 거시경제적 트렌드로 ‘3D’를 지목했다.
고령화에 따른 임금·의료비 상승(Demographics), 무역 전쟁과 리쇼어링으로 인한 공급망 비용 증가(Deglobalization), 친환경 전환 과정의 비용 부담(Decarbonization)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전 세계 국채 시장의 구조적 매도세를 부추기고 있다는 분석이다.
블룸버그는 “전쟁 리스크와 통화정책 불확실성, 장기적인 인구·공급망 체질 변화까지 악재가 겹겹이 쌓이면서 글로벌 채권시장의 약세(채권금리 상승) 흐름은 당분간 불가피해보인다”고 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