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릴데미그라스 함박스테이크
두툼한 한우 패티와 정교한 소스
갓 지은 냄비밥까지 새로운 경험
[블록미디어 권은중 기자] 소고기 스테이크는 오랫동안 밤하늘의 별처럼 귀한 음식이었다. 그러나 음식이 풍요로운 요즘은 소고기 스테이크가 큰 감흥을 주지 못한다. 1990년대 패밀리 레스토랑이 대중화되면서 비로소 대중에게 친숙해지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가까워졌다고는 하지만 1인분에 3만~5만원을 호가하는 소고기 스테이크는 지금까지 대한민국의 외식 메뉴의 정점을 지키고 있다.
1990년대 소고기 스테이크가 최고급 음식의 상징으로 우뚝 서기 전까지 대한민국의 외식 시장을 양분하고 있던 것은 소갈비와 함박(햄버거)스테이크였다. 갈비는 1980년 말 자가용 문화의 보급으로 도시 교외에 무수히 생긴 가든과 함께 한식 외식 메뉴의 정점에 올라섰다. 갈비는 그 전까지 외식의 대명사였던 같은 종류의 고기를 쓰는 불고기는 물론, 좀더 저렴한 돼지갈비와 삼겹살을 아주 가뿐하게 따돌렸다.
경양식을 한때 주름잡던 함박스테이크
함박스테이크도 갈비와 비슷했다. 함박스테이크는 경양식 식당의 최고급 메뉴였다. 당시 함박스테이크는 수프, 샐러드와 함께 주는 정식 메뉴의 정점이었다. 돈가스보다 보통 1.5배에서 2배가 비쌌다. 주머니 사정이 빠듯했던 대학 시절, 함박스테이크는 내가 가장 먹고 싶었던 음식의 하나였다. 그 당시 소고기 스테이크라는 메뉴는 경양식집에 없었다. 스테이크는 상상계 너머의 음식이었다.
함박스테이크는 햄버거스테이크의 일본어 발음인 한바구(ハンバーグ)’가 한국에서 ‘함박’으로 알려졌다. 독일 함부르크 등의 지역에서 다진 소고기를 구운 음식이었는데 이 음식이 개화기 일본으로 전해졌다가 일제강점기 때 한국으로 건너온 것이다. 유럽에서는 ‘프리카델레(Frikadelle)’라고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함박스테이크가 대중화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산업화로 소득수준이 오르면서부터였다. 돈가스가 먼저였고 함박스테이크는 그 다음이었다.
첨언하지면, 함박스테이크를 빵에 끼워서 먹게 만든 것이 미국의 햄버거다. 미국에서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 설은 분분하지만 독일 이민자들이 팔던 합부르크 스테이크를 간편하게 먹으려는 시도에서 파생된 것은 분명하다. 그걸 표준화해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 퍼트린 게 미국 기업 맥도날드다.
‘함박스테키’의 유래를 따져보면, 우리나라 함박스테이크는 미국에서 온 것이 아니라 일본에서 더 많은 영향을 받은 음식이다. 우리나라 경양식집에서 함박스테이크를 돈가스와 함께 팔던 것도 이런 까닭에서였다. ‘경양식(輕洋食)’이라는 말 자체가 일본냄새가 물씬 나지 않나?
일본에서는 함박스테이크를 주로 데미그라스 소스에 낸다. 토마토소스나 브라운소스에 내기도 하지만 데미그라스 소스인 경우가 많다. 데미그라스(Demi-glace)는 프랑스어로 ‘반(demi)으로 졸여낸 걸죽한 소스(glace: 원래 얼음을 의미한다. 조린 소스란 뜻)’를 의미한다. 구운 소뼈와 향미 채소를 오랜 시간 끓여낸 브라운소스에 다시 육수를 넣어 절반 이하로 졸여 걸쭉하게 만든 진한 갈색의 프랑스의 소스다. 12시간 이상 졸여야 해서 주방에서 피하고 싶은 소스의 하나로 꼽힌다.
지난 4월 말, 4박5일의 제주도 일정을 마치고 서울로 온 다음날 바로 갔던 집이 이 함박스테이크를 잘 한다고 소문난 서울 충무로의 그릴데미그라스였다. 한 선배가 내가 제주에 있을 때 “서울에 일본보다 더 맛있는 함박스테이크 집이 있는데 가보겠냐”고 연락이 왔다. 맛있다는 소문은 들어봐서 꽤 궁금한 집의 하나였다. 하지만 나는 일본에서 소고기 스테이크나 돈가츠는 먹어봤지만 햄버거 스테이크는 먹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일본 함박스테이크에 대해서 표준이라고 할 만한 기준이 없었다.
약간 주저하는 내 마음을 읽었는지 선배가 친절하게 사진 몇장을 보내주었는데 딱 봐도 일본 스타일의 함박스테이크였다. 농밀하고 중첩된 맛이 사진으로 읽혔다. 제주에서 맑고 하늘하늘한 정화의 맛에 젖어 있던 나에게 그런 두텁고 진한 도시의 맛은 또다른 유혹이었다.

추억은 방울방울, 육즙은 팡팡
모임이 있던 날은 제주에서 돌아온 다음날이었다. 아직 짐도 제대로 풀지 않은 상태인데다 이날 오전에 라디오방송이 있었다. 오전 7시 반쯤 여의도 방송국에 갔다가 방송을 하고 시내로 나와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다 점심 약속 장소로 갔다. 그러다보니 몸이 꽤 피곤했다. 나이가 들면 모든 게 무섭지만 이동이 가장 무섭다.
그릴데미그라스는 오리엔스 호텔 1층에 있었다. 피곤한 탓인지 안내판을 잘못 읽어 호텔 피트니스 센터로 들어가는 해프닝이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식당을 찾아 들어갔다. 공간은 코지하고 꽤 넓었다. 일본의 깔끔한 패밀리 레스토랑을 연상시켰다. 지금은 없어진 코코스가 떠올랐다. 1990년대 내가 많이 갔던 일본식 패밀리 레스토랑이었다.
멤버 3명이 도착했고 우리는 함박스테이크, 비후가스, 그라탕을 시켰다. 그러자 식전 음식으로 모닝롤과 계란샐러드 감자오이샐러드가 나왔다. 일본식 사라다였다(사실 정식 명칭은 러시안 샐러드 혹은 올리비에 샐러드다. 마요네즈를 러시아 사람들이 너무 좋아해 이런 샐러드를 많이 해 먹는다). 나는 타이트한 일정 탓에 입이 까끌해서 잘 먹지 못했다. 그렇지만 한눈에 봐도 이 집 샐러드가 꽤 정교해 보였다. 마요네즈 범벅도 아니었고 절도가 있었다. 감자 오이 계란의 삶기도 괜찮았고 썰은 크기도 균일했다. 이런 기본적인 게 사실은 가장 어려운 것이다. 잘 하기는 어려워도 조금 방심하면 낭패를 보기 쉬운 탓이다. 주방의 탄탄한 기본기가 엿보였다.
피로 탓에 없던 식욕이 갑자기 생겨나게 만든 것은 다음에 나온 밥이었다. 이 집은 음식에 밥을 함께 주는데 이 밥이 예술이었다. 밥이 너무 찰지고 기름져서 도대체 어떻게 이 밥을 지었을까 궁금증이 생길 정도였다. 찹쌀을 썼는지, 요즘 유행한다는 일본식 주물전기밥솥으로 지었는지 궁금해서 물어봤다. 그랬더니 무심하게 일반 쌀에 냄비밥이라는 답변이 왔다. 그렇지만 무쇠주물냄비에 나도 가끔 냄비밥을 해먹는데 이런 질감이 나오기는 쉽지 않다. 기가 죽었다.
이어 함박스테이크와 비후스테이크가 나왔다. 함박스테이크는 꽤 두툼했다. 두께가 5cm이상은 돼 보였다. 잘 만들어진 계란프라이가 올라가 있었다. 계란프라이의 엄친아쯤이었다. 근사한 비주얼이었다. 프라이한 흔적이 없었다. 수비드한 계란을 잠깐 스팀으로 찐 게 아닐까 싶었다. 수비드란 밀폐된 비닐 봉지에 담긴 음식물을 미지근한 물 속에 오랫동안 데우는 조리법이다.
함박 스테이크 그릇 바닥에 자작하게 깔린 데미그라스 소스는 매우 농후해 보였다. 오래 끓인 듯 꽤 유화가 잘 돼 있었다. 원래 데미그라스는 오랜 시간을 끓여야 하는 무겁고 중후한 다크소스다. 그런데 소스만 살짝 먹어보니 상큼하고 가벼웠다. 눅진하고 어두운 색깔의 내가 아는 데미그라스와는 살짝 거리가 있었다. ‘어 이 집 데미그라스는 가볍네’라고 생각됐다.

경쾌한 데미그라스 소스, 패티 맛 잘 받쳐줘
함박 스테이크를 칼로 썰어보았다. 육즙이 촉촉했다. 자른 패티에 내 생각에는 붉어보이는 데미그라스 소스를 묻혀서 먹어보았다. 그제서야 중후하고 눅진한 맛이 느껴졌다. 두툼한 패티와 빨간 데미그라스 소스의 조화는 다층적인 맛의 결로 이어졌다. 패티의 겉은 바삭바삭하고 속은 촉촉했고 부드러웠다. 이 부드러움은 기름기에서 오는 것인데 데미그라스 소소의 소뼈 기름기와 환상적인 조화를 이뤘다. 또 데미그라스 소스에 들어간 토마토와 와인의 상큼함이 입안을 정리해주었다. 다층적인 풍미와 깔끔한 마무리였다. 춤곡이나 무곡이 떠올랐다.
그릴데미그라스의 비후가스는 특이하게 소고기였다. 매우 부드러웠다. 그리고 일본식 입자가 크고 바삭한 빵가루(팡코라고 한다)로 튀겨냈다. 찍어먹으라고 작은 그릇에 담아 함께 내주는 데미그라스 소스는 함박스테이크의 소스와 달리 매우 눅진하고 진했다. 미리 뽑아놓은 데미그라스 소스를 메뉴에 따라 변용하는 것으로 보였다. 함박스테이크의 경쾌한 데미그라스 소스 맛의 정체를 알 것 같았다. 이런 일본식 디테일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함께 먹었던 새우 그라탕은 탱글하고 씹히는 식감이 좋았다. 하지만 소고기와 함께 먹어서 새우가 담박하게만 느껴졌다. 새우후라이가 따로 있어 새우그라탕은 새우후라이랑 먹어야 결이 맞았다.
식후에 커피를 추가 주문했다. 커피가 상큼하고 균형감이 좋았다. 아프리카와 중남미를 블렌딩한 괜찮은 원두를 쓰고 있었다. 하지만 아프리카도 중남미도 느껴지지 않은 복합적인 맛이었다. 여러 지역을 균형있게 섞은 것 같았다. 계산하고 나올 때 셰프를 만나서 몇 가지를 물어봤는데 일본에서 요리를 배웠고 일본식으로 조리를 하고 있다는 답변을 들었다. 커피도 일본식 블렌딩과 로스팅을 하고 있는 서울 송파의 로스터리에서 가져온다고 한다. 일본 음식 문화의 특징인 중첩과 디테일로 가득한 집이었다.
나는 이날 먹은 함박스테이크가 너무 인상적이어서 1주일쯤 지나 다시 한번 그릴데미그라스에 가서 함박스테이크를 먹어봤다. 패티가 처음에 먹었을 때보다 육즙은 조금 덜했지만 모든 게 퍼펙트했다. 식전 ‘사라다’부터, 곁들이는 밥, 그리고 함박스테이크와 데미그라스 소스까지 물 흐르 듯 정교하게 돌아갔다. 이번에는 소스를 유심히 들여다봤다. 첫번째 먹었을 때 소스가 가장 신기했기 때문이었다. 소스 안에는 작은 오일의 기포들이 정교하게 깔려 있었다. 하나하나 정교하게 올려진 일본식 목조 건물을 보는 느낌이 들었다. 이날은 와인을 시켜봤다. 스페인 템프라니요를 하우스 와인으로 내준다(1만원 추가). 갓 땄는지 산도가 좀 있었다. 발랄한 와인의 산도는 함박스테이크의 유질감을 잘 마무리해 줬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나이가 든 지금 함박스테이크는 물론 소고기 스테이크도 잘 먹지 않았다. 구운 고기가 소화가 잘 안돼 부담스러운 탓이다. 대신 뵈프 부르기뇽(bœuf bourguignon)처럼 와인이나 채소를 많이 넣고 끓인 고기를 먹는다. 구운 고기는 로스트 비프 정도를 그레이비(gravy) 소스를 곁들여 먹는 정도다. 모두 와인과 잘 어울린다.
이런 나의 잦아드는 구운 고기 욕구에 그릴데미그라스 함박스테이크는 제3의 길을 제시했다. 이 집의 함박스테이크는 내가 먹었던 추억의 함박스테이크를 살아있는 실재로 부활시켜줬다. 대학시절에는 주머니 사정으로 못 먹었고, 사회에 나온 뒤에는 다른 맛있는 고기 요리에 밀렸던 함박스테이크를 소생시킨 것이다. 사실 내 추억 속의 함박스테이크가 차지하는 영토는 크지 않았다. 일본식 돈가스와 안심 스테이크에 끼여 있던 미미한 존재감의 음식이었다. 더욱이 나는 이 집의 정교한 데미그라스 소스의 응용법이 궁금해졌다. 이런 호기심 때문에 데미그라스를 변형한 바비큐 소스로 구웠을 돼지갈비 오븐구이도 곧 도전해볼 계획이다.
■그릴데미그라스 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삼일대로2길 50 오리엔스호텔 1층(충무로역 4번 출구에서 200m)
■메뉴: 함박스테이크(2만4000원), 비후가스(2만8000원), 돼지갈비 오븐구이(6만원‧예약 필수)
*권은중 음식전문기자는 기자로 20여 년 일하다 50세에 이탈리아 북부 피에몬테의 ‘외국인을 위한 이탈리아 요리학교(ICIF)’에 유학을 다녀왔다. 귀국 후, 경향신문, 연합뉴스, 조선일보 등에 음식과 와인 칼럼을 써왔고, 관련 강연을 해왔다. 『와인은 참치 마요』, 『파스타에서 이탈리아를 맛보다』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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