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록미디어 명정선 기자] 블록체인 업계의 패러다임이 ‘완전 개방’에서 ‘선택적 프라이버시’로 급격히 선회하고 있다. 골드만삭스, 블랙록, 스트라이프 등 글로벌 금융 거물들이 이른바 ‘프라이버시 블록체인’이라 불리는 차세대 네트워크에 10억달러(약 1조 4500억원) 이상의 거액을 쏟아붓고 나섰다.
13일 투자은행(IB) 업계에 따르면 최근 아크(Arc), 캔튼(Canton), 템포(Tempo) 등 3대 기관용 블록체인 네트워크는 총 10억 달러 규모의 투자 유치를 마무리했다. 이들의 합산 기업 가치는 이미 100억 달러를 넘어섰다. 이번 투자는 지난 2025년 10월부터 올해 5월 사이에 집중됐으며 패러다임, a16z 등 실리콘밸리의 거물급 벤처캐피털(VC)들이 대거 참여했다.
“월급 내역 전 세계 공개?”… 금융권엔 ‘버그’가 된 투명성
그간 블록체인의 미덕으로 꼽혔던 ‘투명성’이 오히려 기관 진입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맷 호건 비트와이즈 최고투자책임자(CIO)는 최근 기고문에서 “모든 거래 내역이 블록 탐색기(Explorer)를 통해 실시간 공개되는 구조는 기업에 ‘기능’이 아닌 ‘버그(결함)'”라고 직격했다.
실제로 이더리움이나 솔라나 같은 공용 블록체인에서는 헤지펀드의 포지션 구축 과정이 밀리미터초 단위로 노출돼 경쟁사의 ‘프런트 러닝(선행 매매)’ 타깃이 되기 쉽다. 법인 급여가 스테이블코인(USDC)으로 지급될 경우 전 세계 누구나 이를 들여다볼 수 있다는 점도 치명적이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자산 운용의 비밀 유지가 필수적인 금융기관들에 이더리움의 개방성은 곧 리스크”라고 설명했다.
3대 진영의 각축전… ‘캔튼’ 앞서가고 ‘템포·아크’ 추격
현재 가장 앞서나가는 곳은 디지털 에셋 홀딩스가 개발한 ‘캔튼(Canton)’이다. 이미 골드만삭스, 시타델 증권, 나스닥, S&P 글로벌 등이 네트워크에 합류했다. 지난 2월에는 2조 달러 규모의 토큰화된 영국 국채(Gilts)를 활용해 세계 최초로 교차국가 환매조건부채권(Repo) 거래를 성공시키며 실효성을 입증했다. 캔튼은 거래 당사자에게만 데이터를 공개하는 ‘기본값 비공개’ 원칙을 고수한다.
핀테크 공룡 스트라이프(Stripe)와 패러다임이 주도한 ‘템포(Tempo)’도 지난해 10월 50억 달러의 기업 가치로 5억 달러를 조달했다. 기업 자금 관리와 국가 간 결제(FX)에 특화된 것이 특징이다.
블랙록과 a16z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아크(Arc)’는 ‘경제시스템 운영체제(OS)’를 표방한다. USDC로 가스비(수수료)를 결제하며, 0.5초 이내의 빠른 거래 확정성과 이더리움 가상머신(EVM) 호환성을 무기로 시장 점유율을 높이고 있다.
‘모네로’와는 다르다… 규제 준수하는 ‘스마트 프라이버시’
전문가들은 이들 네트워크가 지향하는 프라이버시가 과거 ‘모네로(Monero)’ 같은 다크코인의 ‘절대적 익명성’과는 궤를 달리한다고 입을 모은다.
이들이 내세우는 ‘선택 가능한 프라이버시(Configurable Privacy)’는 고객확인(KYC) 및 자금세탁방지(AML) 규정을 준수하면서도, 필요에 따라 감사 기관에만 데이터를 공개할 수 있는 구조다. 이는 유럽의 자산 세무 데이터 자동 교환 지침(DAC8)이나 현재 미국 상원을 통과 중인 ‘클래리티 법안(Clarity Act)’과도 상충하지 않는다.
맷 호건은“기관용 레이어 네트워크를 장악하는 곳이 향후 결제 수수료와 거버넌스 규칙, 나아가 산업 전반의 수익 구조를 통제하게 될 것”이라며 “글로벌 금융사들이 이 분야에 사활을 거는 이유”라고 강조했다.
프라이버시 블록체인의 부상은 개인 투자자들에게도 간접적인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일반 사용자가 캔튼이나 아크의 인프라를 직접 사용할 일은 드물지만, 향후 은행 앱이나 거래소 등을 통해 이용하게 될 스테이블코인 및 증권형 토큰(STO)의 기반 인프라가 이들 네트워크로 대체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코인베이스 리서치는 지난 1월 보고서를 통해 “올해 말까지 프라이버시 관련 토큰의 시가총액이 1000억 달러에 달할 것”으로 내다봤다. 시장의 움직임도 가파르다. 코인게코에 따르면 지캐시(Zcash)와 모네로는 지난 한 해 각각 691%, 143% 급등하며 시장의 관심을 반영했다.
향후 관전 포인트는 미국의 클래리티 법안 내 ‘결제 인프라’ 관련 규제 문구 확정이다. 이 이벤트가 향후 수년간 기관용 블록체인 시장의 상업적 생태계를 결정짓는 이정표가 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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