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록미디어 김해원 기자] 디지털자산기본법 논의가 정치 일정에 묶여 장기 표류하는 사이, 한국은행의 중앙은행디지털화폐(CBDC) 및 예금토큰 실증 사업 ‘프로젝트 한강’은 지체 없이 추진되면서 국내 디지털자산 정책의 무게 중심이 민간 시장이 아닌 중앙은행 중심 구조로 이동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6일 은행권에 따르면 한국은행은 ‘프로젝트 한강’ 2단계 사업을 본격화한 이후 상용화 준비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한강 2단계는 지난 3월 종합 컨설팅 입찰을 시작으로, 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IBK기업·BNK부산은행을 비롯해 경남은행과 iM뱅크 등 총 9개 은행이 외부 수행사 선정과 자체 시스템 구축에 착수하며 실거래 환경 구현을 준비 중이다.
프로젝트 한강은 중앙은행이 기관용 CBDC를 발행하고, 시중은행이 이를 기반으로 예금토큰을 발행·유통하는 구조다.

특히 이번 2단계 사업에서도 예금토큰 발행과 유통에 활용되는 블록체인 인프라는 1단계 실증과 동일한 구조를 유지한다.
프로젝트 한강 1차 실거래 파일럿 결과보고서에 따르면 디지털화폐 시스템은 분산원장 기반 인프라와 기존 금융 시스템을 결합한 이중 구조로 설계됐다. 시스템은 예금토큰과 디지털화폐가 실제로 발행·유통되는 분산원장 영역과, 이를 은행 계정·모바일 애플리케이션 등 기존 금융 서비스와 연결하는 외부 시스템으로 구성된다.
분산원장 시스템은 한국은행과 참여 은행들이 공동으로 거래 원장을 기록·검증하는 구조다. 다수의 노드가 합의 방식으로 거래를 검증함으로써 데이터 위·변조를 방지하고 거래의 정확성과 투명성을 확보한다. 해당 시스템은 허가형(퍼미션드) 블록체인으로 설계돼 지정된 금융기관만 네트워크에 참여할 수 있으며, 원장 데이터 역시 한국은행과 참여 은행에 한해 제한적으로 조회할 수 있도록 했다.
여기에 스마트 계약 기능이 핵심적으로 적용됐다. 예금토큰의 발행 조건과 총 발행량, 거래 실행 방식 등을 사전에 코드로 설정해 일정 조건이 충족되면 자동으로 거래가 실행되도록 한 것이다. 이를 통해 별도의 중개 없이 지급·결제가 이뤄지며, 처리 효율성과 투명성이 동시에 개선되는 구조다.
외부 시스템에서는 한국은행과 시중은행의 역할이 분리된다. 한국은행은 디지털화폐 관리 시스템과 한은금융망을 통해 기관용 CBDC의 발행·환수 등을 담당하고, 시중은행은 이를 기반으로 예금토큰을 발행·유통한다. 동시에 은행들은 사용자 계정 관리, 모바일 앱, 결제 서비스 등을 운영하며 실제 이용 환경을 제공한다.
이에 따라 프로젝트 한강은 중앙은행이 통화의 기반을 제공하고, 시중은행이 이를 활용해 실사용 가능한 디지털화폐를 공급하는 구조다. 블록체인을 적용했지만 퍼블릭 네트워크 기반의 탈중앙 구조라기보다는, 중앙은행과 제도권 금융기관이 통제권을 유지하는 ‘허가형 디지털 금융 인프라’에 가깝다.
1단계에서는 디지털화폐와 예금토큰이 발행부터 유통, 환수, 폐기까지 전 과정에서 정상적으로 작동하는지 검증하는 데 집중됐다면, 2단계에서는 실사용 환경에 가까운 기능 확장이 핵심이다. 개인 간 송금 기능이 도입되고, 생체인증 기반 접근과 자동 입출금 기능이 추가되면서 이용 편의성이 개선된다. 사용처 역시 소상공인과 대형 가맹점 등 실제 결제 환경으로 확대될 예정이다.
특히 2단계에서는 정부 재정 집행 영역까지 예금토큰 활용이 확대된다. 기후에너지환경부의 전기차 충전시설 구축 사업을 시작으로 국고보조금 집행에 예금토큰을 적용하는 시범사업이 추진될 예정이며, 재정경제부도 업무추진비를 예금토큰으로 집행하는 규제샌드박스 사업을 검토 중이다. 집행 시간과 사용처를 사전 설정해 통제하고 결제 투명성을 높이는 동시에 중개 수수료 절감 효과를 검증하겠다는 구상이다.
다만 현재까지 관련 인프라 구축 사업자 선정 공고는 나오지 않은 상태다. 한국은행 관계자는 “국고보조금 적용 외에 추가로 진전된 사항은 아직 없다”고 밝혔다.
민간 금융권도 이에 발맞춰 움직이고 있다. NH농협카드는 카드와 은행 기능을 결합한 겸영사업 구조를 바탕으로 디지털 결제 인프라 구축에 나섰고, 하나금융그룹은 자체 블록체인 ‘기와체인’을 기반으로 해외송금 기술 검증을 마치며 CBDC·예금토큰 환경 대응에 속도를 내고 있다.
반면 민간 디지털자산 산업의 핵심 제도인 디지털자산기본법은 여전히 정치 일정에 발목이 잡혀 있다. 국회 정무위원회 일정 지연과 주요 정치 이벤트가 겹치면서 연내 처리 가능성은 낮아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에 따라 원화 스테이블코인 제도화, 장외거래(OTC), 프라임브로커리지, 기관투자 허용 등 산업 기반 역시 함께 지연되며 시장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다.
시장에서는 이러한 정책 추진 속도의 격차가 결국 중앙은행 중심의 인프라가 민간 시장보다 먼저 자리 잡는 구조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다만 CBDC나 예금토큰 상용화를 위한 실질적인 규정이 부족하다는 평가다.
업계 관계자는 “예금토큰은 아직 기술 검증 단계로, 발행·유통 인프라 규정이 명확해져야 실질적인 사업화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