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록미디어 명정선 기자] 미국 최대 은행 JP모건체이스의 제이미 다이먼 최고경영자(CEO)가 최근 연례 주주서한에서 이례적으로 특정 회사를 직접 언급했다. 그 이름은 ‘씨타델증권(Citadel Securities)’이다. 약 2만5000단어에 달하는 방대한 서한에서 경쟁 심화를 설명하며 씨타델을 콕 집어 거론한 것은, 이 고빈도 매매 강자가 이제 월가 전통 투자은행(IB)의 핵심 영역까지 파고들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으로 해석된다.
21일(현지시각) 블룸버그와 JP모건 등에 따르면 씨타델증권이 최근 헤지펀드·자산운용사·연기금 등을 상대로 한 ‘대형 주식 블록딜(High-touch trading)’ 사업을 본격 확대하고 있다. 이는 소액·다빈도 주문을 알고리즘으로 처리하는 기존 ‘로우터치(low-touch)’ 사업과는 정반대 영역이다.
‘개미 주문 35%’ 강자, 기관 대형 거래로 확장
씨타델증권은 현재 미국 개인투자자 주식 거래의 약 35%, 전체 주식 주문의 24%를 처리하는 초대형 마켓메이커다. 초고속 알고리즘을 기반으로 한 로우터치 모델을 통해 거래당 수익은 낮지만 방대한 물량으로 안정적인 수익 구조를 구축해왔다. 이 같은 압도적 유동성 장악력이 오늘날 씨타델의 경쟁력의 근간이다.
그러나 회사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있다. 하이터치 거래는 건수는 적지만 규모가 크고, 시장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해 트레이더의 직접 개입이 필요한 고난도 영역이다. 블룸버그 인텔리전스 분석에 따르면 하이터치 데스크는 전체 주식 브로커 수수료의 55%를 차지한다. 수익성과 고객 관계 측면에서 전통 은행들이 강한 지배력을 유지해온 이유다. 씨타델이 이 시장에 본격 진입했다는 것은 월가의 ‘안방’을 정면으로 겨냥했다는 의미로 읽힌다.
재무적 여력도 뒷받침된다. 씨타델증권은 지난해 122억 달러의 거래 수익을 기록하며 사상 최대 실적을 냈다. 이는 전년(97억 달러) 대비 약 25% 증가한 수준이다. 탄탄한 자본력은 대형 기관 주문을 직접 받아 리스크를 흡수할 수 있는 기반이 되며, 이는 하이터치 사업 확장의 필수 조건이다.
인재 영입전 본격화…은행 출신 대거 합류
전략 변화는 인재 영입에서도 드러난다. 씨타델은 월가 은행 출신 인사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며 조직 체질 개선에 나섰다. 골드만삭스 출신 짐 에스포지토 사장이 합류해 고객 커버리지 조직을 구축했고, JP모건의 하이터치 주식 트레이딩 책임자였던 엘런 루거도 지난해 회사를 옮겼다. 이는 기술 중심 조직에 전통 IB식 관계 영업 역량을 결합하려는 시도로 풀이된다.
이 같은 움직임은 기존 은행들과의 긴장 관계로 이어지고 있다. JP모건은 더 이상 자체 대형 주식 주문 일부를 씨타델에 넘기지 않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동시에 씨타델은 여전히 JP모건의 프라임브로커리지 고객이기도 하다. 협력과 경쟁이 교차하는 ‘프레너미(frenemy)’ 관계가 본격화되고 있는 셈이다.
기술력·데이터, 은행과 차별화 포인트
시장 전문가들은 씨타델의 차별화 요인으로 △첨단 거래 기술 △개인투자자 흐름 데이터 △공격적인 자본 투입 능력을 꼽는다. 씨타델은 ‘트레이드 시커(Trade Seeker)’ ‘리퀴디티 파인더(Liquidity Finder)’ 등 대형 주문 처리 기술을 도입했으며, 옵션 거래 도구도 강화했다. 크리실 코얼리션 그리니치의 제시 포스터는 “충분한 자금과 유동성을 갖춘 만큼 기관 주문 경쟁에서도 승산이 있다”고 평가했다.
더 나아가 씨타델은 전직 중앙은행 총재와 정부 고위 관료를 초청해 고객 대상 거시경제 브리핑을 제공하며 리서치 기능까지 확대하고 있다. 이는 전통적으로 은행이 강점을 지녀온 서비스 영역이다. 단순 유동성 공급자를 넘어 ‘거래 솔루션 제공자’로 자리매김하려는 전략으로 읽힌다.
월가 지형 변화…‘은행 vs 마켓메이커’ 구도 재편
그렇다고 해서 은행의 아성이 쉽게 무너질 것으로 보긴 어렵다. 은행들은 IPO 주관, 채권 발행, 프라임브로커리지 등 종합 금융서비스를 묶어 제공할 수 있는 구조적 강점을 지닌다. 블룸버그 인텔리전스의 래리 태브 애널리스트는 “마켓메이킹에서 이익이 난다면 거래량을 늘릴수록 사업이 커진다”며 “기관 투자자 시장으로의 확대는 자연스러운 전략”이라고 분석했다. 다만 이는 시장 파이를 둘러싼 경쟁의 심화를 의미하기도 한다.
현재로선 ‘승자독식’ 구도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지정학적 불확실성 속에서도 올해 1분기 대형 은행 트레이딩 데스크는 기록적인 수익을 거둔 것으로 나타났다. 시장 자체가 확대되는 국면에서는 비은행 마켓메이커와 전통 IB가 일정 부분 공존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월가 권력 지형의 구조적 변화 신호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움직임은 분명 월가 권력 지형 변화의 신호탄으로 읽힌다. 개인투자자 거래 장악에서 출발해 기관 대형 주문으로 확장하고, 다시 데이터·기술 기반 서비스로 고도화하는 단계적 진화 전략이 본격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향후 관건은 △기관 고객 신뢰 확보 △은행과의 관계 관리 △규제 환경 변화 △위기 상황에서의 리스크 흡수 능력이다. 씨타델증권이 단순한 ‘초고속 트레이딩 회사’를 넘어 월가의 핵심 유동성 공급자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지, 그리고 JP모건을 비롯한 전통 은행들이 어떤 방어 전략을 펼칠지가 글로벌 금융시장의 새로운 관전 포인트로 떠오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