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록미디어 명정선 기자] 미국 월스트리트의 거물급 사모펀드(PEF)들이 기업 대출 시장의 포화 상태를 넘어 일반 소비자들의 ‘지갑’을 정조준하고 있다. 고금리와 규제 강화로 몸집을 줄이는 전통 은행들의 빈자리를 프라이빗 크레딧(Private Credit·사모 대출) 펀드들이 빠르게 잠식하면서, 미국 금융 생태계의 권력 이동이 가속화되는 양상이다.
19일(현지시각) 월스트리트저널(WSJ)등에 따르면, 최근 글로벌 사모펀드들은 소비자들이 향후 발생시킬 부채를 미리 매입하기로 약정하는 ‘포워드 플로우(Forward-flow)’ 계약에 수십억 달러를 쏟아붓고 있다. 과거 기업의 인수합병(M&A) 자금을 대던 사모펀드가 이제는 개인의 카드 대금과 오토바이 할부금까지 책임지는 ‘큰 손’으로 부상한 것이다.
은행이 외면한 핀테크, 사모펀드엔 ‘기회의 땅’
이러한 흐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최근 발생한 핀테크 기업 ‘빌트(Bilt)’의 자금 조달 사례다. 월세 결제 시 포인트 혜택을 제공하며 급성장한 빌트는 최근 주요 파트너였던 웰스파고(Wells Fargo)로부터 신용카드 파트너십 중단 통보를 받았다. 은행권이 리스크 관리를 이유로 발을 빼자 빌트가 찾아간 곳은 사모펀드였다.
블루아울 캐피털(Blue Owl Capital)과 스톤포인트 캐피털 등 사모펀드 연합군은 골드만삭스, TD은행과 손잡고 빌트의 카드 잔액 약 12억달러(약 1조 6500억원)를 인수하는 딜을 성사시켰다. 익명을 요구한 월가의 한 투자은행(IB) 관계자는 “은행들이 자본 확충 규제로 인해 대출 자산을 매각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자, 현금 동원력이 뛰어난 사모펀드들이 이를 헐값이나 유리한 조건에 넘겨받는 ‘빅딜’이 쏟아지고 있다”고 귀띔했다.
사모펀드의 침투는 전방위적이다. 할리데이비슨 오토바이 구매자의 대출 채권 3분의 2는 현재 KKR과 핌코(Pimco)가 사들이고 있으며, 어펌(Affirm)의 후불결제(BNPL) 서비스나 솔리메이(Sallie Mae)의 학자금 대출 역시 사모펀드 자금이 뒷받침하고 있다. 제프리스(Jefferies)의 분석에 따르면, 지난해 신규 개인대출 중 사모펀드 자금이 차지하는 비중은 25%에 달해 전년(6%) 대비 4배 이상 폭증했다.
“수익 다변화의 한 축” vs “연체율 상승 시 도미노 붕괴 우려”
전문가들은 사모펀드의 이 같은 행보를 ‘포트폴리오 다변화’ 전략의 일환으로 보고 있다. 마이크 타이아노 무디스(Moody’s) 금융기관 그룹 부사장은 “사모 대출 시장이 과거 기업 금융에 치우쳤던 구조에서 벗어나 소비자 금융으로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며 “이는 수익원을 분산해 리스크를 관리하려는 고도의 전략적 선택”이라고 분석했다.
실제로 핀테크 기업들은 대출 채권을 사모펀드에 즉각 매각함으로써 장부상 부채를 덜어내고(Capital Light), 더 많은 신규 대출을 일으킬 수 있는 동력을 얻는다. 하지만 비판적인 시각도 만만치 않다. 사모펀드의 자금은 은행 예금처럼 안정적이지 않아, 시장 상황이 악화되면 언제든 회수될 수 있는 ‘불안한 돈’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월가 내부에서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익명을 요구한 한 사모펀드 고위 관계자는월스트리트저널에 “일부 핀테크 기업들이 사모펀드의 포워드 플로우 자금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중독 현상’을 보이고 있다”면서 “만약 경기 침체로 연체율이 치솟으면 사모펀드들은 즉각 계약을 파기하거나 자금을 회수할 것이며, 이는 해당 핀테크사의 존립을 흔드는 유동성 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실제로 블루아울은 최근 빌트와의 거래 막판에 예상 수익 보장을 요구하며 딜을 철회하겠다는 압박을 가하는 등 까다로운 조건을 내걸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사모펀드가 자선사업가가 아닌, 철저히 수익과 리스크 관리에 따라 움직이는 ‘기회주의적 투자자’임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거침없이 몸집을 불리는 미국의 사모 대출 시장이 전통적 금융 시스템의 보완재가 될지, 아니면 경기 하강 국면에서 새로운 ‘금융 위기의 뇌관’이 될지 전 세계 투자자들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