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록미디어 명정선 기자] 싱가포르 금융지구 인근의 한 익명성 높은 건물. 이곳에는 세계에서 1인당 생산성이 가장 높은 기업 중 하나로 꼽히는 탈중앙화 가상자산 거래소 ‘하이퍼리퀴드(Hyperliquid)’의 본거지가 있다. 단 11명의 직원이 지난해 올린 순이익은 9억달러(약 1조 3500억원). 직원 1인당 1200억원이 넘는 수익을 낸 셈이다.
하지만 이들의 사무실 입구에서 가장 먼저 마주하는 것은 화려한 기업 로고가 아닌, 단단한 체구의 무장 경호원이다. 압도적인 수익성이 불러온 ‘납치와 폭력’이라는 업계의 어두운 그림자가 이들을 삼엄한 경계 속으로 몰아넣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2025년 가상자산 보유자를 겨냥한 강력 범죄가 급증하면서, 창업자 제프리 얀(Jeffrey Yan·31)은 집 엘리베이터까지 따라온 낯선 이들의 위협을 겪은 뒤 싱가포르로 거처를 옮기고 24시간 밀착 경호를 선택해야 했다. 성공의 전리품이 곧 생존의 위협이 된 아이러니한 현장이다.
13일(현지시각) 투자 매거진 콜로서스(Colossus)가 공개한 프로필 ‘Beyond the Sky’에 따르면, 제프리 얀은 최근 가상자산 업계에서 가장 위험하면서도 경이로운 인물로 통한다. 그는 실리콘밸리 거물급 벤처캐피털(VC)들이 내민 1억 달러(약 1500억원) 규모의 투자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 대신 그는 수십억 달러 가치의 토큰을 초기 사용자들에게 조건 없이 에어드롭(무상 배분)으로 뿌렸다. 자본의 논리가 지배하는 금융계에서 그는 철저히 ‘아웃사이더’의 길을 걷고 있다.
“하늘 너머에 하늘이 있다”… 올림피아드 금메달리스트의 각성
제프리 얀의 삶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경쟁’과 ‘본질’이다. 캘리포니아 레드우드 쇼어스에서 중국계 이민자 가정의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그는 초등학교 3학년 때 부모의 이혼을 겪었다. 회계사였던 어머니는 매년 세금 시즌마다 초과근무를 하며 그를 키웠다. 어머니는 항상 “인외유인 천외유천(人外有人 天外有天·사람 밖에 사람이 있고, 하늘 밖에 하늘이 있다)”이라고 가르쳤다.
변화는 8학년 때 찾아왔다. 우연히 참가한 수학 경시대회에서 그는 단순 연산이 아닌 ‘증명의 미학’을 발견했다. 얀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학교 수학은 반복 연산일 뿐이지만, 경시대회는 스포츠와 같았습니다. 세 문장짜리 문제를 다섯 시간 동안 들여다보며 보이지 않는 진실을 찾아내는 그 우아함에 매료됐죠.”
이후 독학으로 물리 올림피아드 세계 24위(금메달)에 오른 그는 하버드대 컴퓨터과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뒤, 월가의 전설적인 초단타 매매(HFT) 기업 ‘허드슨리버트레이딩(HRT)’에 입사했다. 하지만 8개월 만에 사표를 던졌다. 기성 시스템을 0.1% 개선하는 일보다 “내가 세상에 어떤 가치를 더하고 있는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였다.
거실 TV로 일군 ‘카멜레온’의 부상과 FTX의 교훈
직장을 떠난 얀은 푸에르토리코의 작은 아파트에서 홀로서기를 시작했다. 거실 TV를 모니터 삼아 하루 14시간, 주당 100시간씩 코딩에 매달린 끝에 익명 트레이딩 조직 ‘카멜레온 트레이딩’을 구축했다. 단돈 1만 달러로 시작한 이 프로젝트는 수천 퍼센트의 수익률을 기록하며 그를 단숨에 억만장자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2022년 발생한 FTX 파산 사태는 그를 다시 세상 밖으로 끌어냈다. 중앙화된 거래소가 고객의 예금을 유용하고 신뢰를 저버리는 모습을 목격한 얀은 큰 충격을 받았다.
“가상자산이 제거하려던 중앙집권적 폐해를 업계가 스스로 다시 불러들이고 있다.”
그는 결단을 내렸다. 수익성이 극에 달했던 카멜레온 트레이딩을 종료하고, 누구도 조작할 수 없는 투명한 금융 시스템을 직접 만들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하이퍼리퀴드다.
바이낸스의 아성에 도전하는 11명의 전사들
하이퍼리퀴드는 단순한 거래소가 아니다. 이들은 기존 블록체인들이 너무 느려 파생상품 거래를 처리하지 못하자, 아예 자신들만의 블록체인(L1)을 직접 설계했다.
하이퍼리퀴드의 핵심 무기는 ‘유동성의 민주화’다. 과거 월가의 대형 헤지펀드들만 향유하던 고빈도 매매 전략을 ‘HLP’라는 볼트(Vault)를 통해 일반인에게 공개했다. 누구나 10달러만 있으면 제프리 얀이 설계한 알고리즘에 투자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이 파격적인 시도는 주말도 없이 24시간 돌아가는 S&P500 선물, 원유 선물 시장 등으로 확장하며 기존 시장을 위협했다.
[표] 주요 거래 플랫폼 비교
| 구분 | 하이퍼리퀴드 | 전통 거래소 (CME 등) | 중앙화 코인거래소 (바이낸스 등) |
| 운영 시간 | 24시간 365일 | 주말/휴일 휴장 | 24시간 365일 |
| 자산 통제 | 사용자 직접 보유 (Self-custody) | 중개기관 위탁 | 거래소 일괄 보관 |
| 수수료 구조 | 투명한 온체인 기록 | 복잡한 중개 수수료 | 거래소 임의 설정 |
| 인프라 | 자체 블록체인 | 중앙 서버 | 중앙 서버 |
1억 달러 투자 거절의 이유… “중립성이 곧 생존”
하이퍼리퀴드가 빠르게 성장하자 VC들이 줄을 서기 시작했다. 10억 달러 가치의 투자 조건서(Term sheet)가 날아왔고, 약 1억 달러의 현금이 손에 잡힐 듯했다. 하지만 제프리 얀은 거절 의사를 밝혔다.
“비트코인이 VC 라운드를 거쳤다면 지금의 비트코인은 아닐 것입니다. 가치제안 자체가 깨졌을 겁니다.”
그는 투자자도, 내부자도, 유료 시장조성자도 없는 길을 택했다. 그리고 2024년 11월 29일, 전체 공급량의 31%를 9만 4천명의 사용자에게 에어드롭했다. 시초가 기준 10억달러, 고점 기준 160억달러(약 24조원)에 달하는 가상자산 역사상 최대 규모의 부의 이전이었다.
전쟁의 시작: 젤리젤리 사태와 190억 달러의 청산
성공의 대가는 ‘전쟁’이었다. 점유율이 높아지자 바이낸스 등 기존 거물들의 견제가 시작됐다. 2025년 3월, ‘젤리젤리(Jelly Jelly)’라는 무명 토큰을 이용한 시세 조작 공격이 발생했다. 시스템의 허점을 노린 공격으로 1200만 달러의 손실이 발생할 위기였다.
이때 전 세계 20여 명의 검증자가 투표를 통해 공격자의 포지션을 무효화하며 대응했다. 얀은 “속도와 정당성을 지키기 위한 최선의 설계였다”고 반박했다.
진짜 시험은 2025년 10월 10일 찾아왔다.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위협으로 시장에서 190억달러(약 28조5000억원) 규모의 포지션이 청산되는 대폭락장이 연출됐다. 많은 거래소가 마비되는 혼란 속에서도 하이퍼리퀴드는 다운타임 없이 모든 거래를 처리해냈다. 가장 투명하게 데이터를 공개했기에 역설적으로 가장 위험해 보였지만, 시스템의 견고함은 완벽히 증명됐다.
금융의 프랜차이즈화, 그리고 ‘다음 한 수’
14일 코인마켓캡 기준 하이퍼리퀴드의 완전 희석 가치(FDV)는 약 64조원(429억달러)을 넘어섰다. 이는 국내 시가총액 4위권 기업인 현대차와 맞먹는 규모다. 이제 하이퍼리퀴드는 거래소를 넘어 ‘금융 인프라’로 진화하고 있다. ‘HIP-3’ 업그레이드를 통해 외부 개발자들이 하이퍼리퀴드 위에 원유, 금, S&P500 등 전통 자산 시장을 직접 개설하고 있다. 독립 팀인 Trade[XYZ]는 이미 CME(시카고상업거래소) 거래량의 일부를 잠식하고 있다.
얀은 하이퍼리퀴드를 ‘금융계의 오픈AI’로 만들고자 한다. 자신이 모든 것을 통제하는 대신, 전 세계 개발자들이 이 인프라 위에서 각자의 은행과 앱을 세우는 세상을 꿈꾸는 것이다. 기자가 “정말 하이퍼리퀴드가 모든 금융을 담을 수 있느냐”고 묻자 얀은 웃으며 답했다.
“바둑과 체스의 차이입니다. 체스는 많은 수를 앞서 읽지만, 바둑은 경우의 수가 너무 많아 ‘다음 한 수’에 대한 직관이 중요하죠. 방향이 맞다는 확신만 있다면, 지금 두는 한 수를 최대한 잘 두는 것이 중요합니다.”
취재를 마치고 떠나는 길, 싱가포르 금융지구의 대형 은행 로고들이 밤하늘 아래 빛나고 있었다. HSBC, JP모건, 씨티. 그 거대한 빌딩들이 백미러에서 사라질 때, 제프리 얀은 경호원이 기다리는 사무실로 돌아가 다시 ‘다음 한 수’를 적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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