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톨·트라피구라·군보르 등 70억 달러 신용공여 확보 나서
유가 급등락에 따른 유동성 위기 선제적 대응
2022년 에너지 위기 학습효과… "보수적 리스크 관리"
[블록미디어 명정선 기자] 글로벌 원유 중개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대형 트레이딩 기업들이 이란발(發) 전쟁으로 인한 에너지 시장 변동성에 대비해 총 70억 달러(약 9조 2400억 원) 규모의 신용 한도 확보에 나섰다. 유가 급등락 시 발생할 수 있는 대규모 증거금 납입 요구(마진콜) 사태를 방지하기 위한 선제적 ‘현금 쌓기’로 풀이된다.
11일(현지시각) 블룸버그 등 외신에 따르면 비톨(Vitol) 그룹, 트라피구라(Trafigura), 군보르(Gunvor) 등 세계 최대 원유 트레이더들은 최근 주요 은행권과 신규 신용공여(Credit Line) 확대를 위한 긴급 협상을 진행하고 있다.
트라피구라, 30억 달러 확보 완료… “유동성 버퍼 구축”
가장 먼저 움직인 곳은 세계 2위 원유 트레이더인 트라피구라다. 트라피구라는 지난 화요일 30억 달러 규모의 신용공여 시설을 확보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회사 측은 이번 조치가 “원자재 가격 변동성이 극심해질 경우에 대비한 유동성 버퍼(완충 지대)를 마련하기 위함”이라고 설명했다.
업계 1위인 비톨 역시 약 30억 달러 규모의 추가 자금 조달을 논의 중이며, 군보르 또한 10억 달러 수준의 신용 라인을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비톨과 군보르 측은 이번 자금 조달과 관련해 공식적인 입장 표명을 거부했다.
‘마진콜’ 공포… 2022년의 교훈
이들이 앞다투어 금융권으로부터 ‘실탄’을 빌려오는 이유는 원유 중개 업무의 특성 때문이다. 트레이더들은 유가 변동 위험을 헤지(Hedge)하기 위해 선물 시장에서 대규모 포지션을 취한다. 이때 유가가 예상 범위를 벗어나 급등할 경우 거래소에 막대한 증거금을 즉시 납입해야 하는 ‘마진콜’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실제로 지난 9일 이란 전쟁 여파로 국제 유가가 배럴당 120달러선까지 치솟자 업계 내부에서는 유동성 위기에 대한 경고등이 켜졌다. 비록 현재는 유가가 다소 진정세를 보이고 있으나, 전쟁의 불확실성이 여전한 만큼 ‘최악의 시나리오’에 대비하겠다는 전략이다.
이는 지난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당시의 학습효과이기도 하다. 당시 가스 가격이 폭등하며 현금이 고갈된 일부 트레이더들은 파산 직전까지 몰려 각국 정부와 은행에 긴급 지원을 요청한 바 있다.
시장은 여전히 ‘안갯속’… “전쟁 장기화 대비”
스테판 얀스마(Stephan Jansma) 트라피구라 최고재무책임자(CFO)는 “이번 신규 자금 확보는 리스크 관리에 대한 우리의 선제적이고 보수적인 접근 방식을 반영한 것”이라고 밝혔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이란 전쟁이 매우 곧(very soon) 끝날 것”이라고 낙관적인 전망을 내놓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장 전문가들은 트레이더들의 이러한 움직임을 전쟁 장기화에 대비한 ‘보험’으로 보고 있다. 유가가 다시 한번 폭등할 경우, 충분한 유동성을 확보하지 못한 업체는 시장에서 퇴출당할 수 있다는 위기감이 반영된 결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