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도, 일본식 수제 탕종 식빵에
120시간 숙성 흑돈 돈가스
단순한 한끼 아닌 맛의 플렉스
[블록미디어 권은중 기자] 나의 첫 양식은 돈가스였다. 1980년대 대학교 때, 한 여대 앞에서 미팅을 나가서 돈가스를 처음 먹어봤다. 솔직히 맛은 없었다(거기다 미팅도 실패였다). 아마 냉동 돈가스였던 것 같다. 거기다 가격이 1천~2천원쯤 비싼 함박 스테이크가 훨씬 더 맛이 있었다는 것을 금세 알게 됐다. 그리고 곧 냉동 돈가스를 학교 구내식당에서 1천원에 팔기 시작하면서 돈가스는 더 이상 나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러다 사회에 나온 1990년대 중반 즈음 서울 광화문 한국일보사 앞에 일본인이 하는 돈가스 집이 생겼다. 거기서 진짜 일본식 생돈가스를 처음 먹어봤다. 내가 지금껏 먹어 왔던 돈가스와 무척 달랐다. 훨씬 두툼했고 생고기를 튀겨 부드럽게 씹혔다. 소금만 찍어 먹어도 맛이 있었다. 그 뒤로 비슷한 콘셉트의 생고기 돈가스 집이 여러 곳이 생겼다. 나는 그런 돈가스 집을 자주 갔었다.
2000년 초 기자시절, 출장으로 처음 일본에 가서 일본 본토 ‘돈가츠’를 처음 먹게 됐다(이하 일본에서 먹었던 경우는 ‘돈가츠’로 씀). 원조를 먹는다는 설렘을 총족시켜줄 만큼 맛이 있었다. 함께 아사히 생맥주를 곁들였는데 조화로웠다(삿포로 생맥주도 맛있었는데 돈가츠보다는 라멘과 어울렸다).
돈가스, 양식에 대한 일본인의 시선 담겨
‘돈가츠’는 일본인들이 19세기 강제 개항을 당한 뒤, 서양의 커틀렛을 독자적으로 받아들여 만든 일본식 서양 음식이다.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시작된 커틀렛은 송아지 고기를 얇게 펴서 만든다(오스트리아 슈니첼이 원조라는 설도 있다). 코톨레타(Cotoletta-등뼈에 붙은 고기라는 뜻)라고 하는데 이게 프랑스와 영국으로 건너가서 커틀렛이 됐다. 이 단어가 일본으로 전해져서 ‘가츠’가 된 것이다. 일본인들은 소고기보다 저렴한 돼지에 주목해서 ‘돼지 돈(豚)’자를 붙여 ‘돈가츠’라고 명명한 것이다. 이 음식이 우리나라에 와서는 돈가스가 됐다. 참 먼 여정을 거쳐 돈가스는 우리 곁에 왔다.
일본의 ‘돈가츠’는 서양에서 유래됐다고 하지만 서양 커틀렛과는 완전히 다르다. 두툼하게 튀겨낸 돼지고기 살에 양배추를 듬뿍 곁들여 밥이랑 먹는다. 된장국까지 나온다. 거기다 포크가 아니라 젓가락으로 먹는다. 일본인들은 모방도 잘하지만 이를 새롭게 바꾸는 것도 아주 잘한다. 나는 이탈리아 레스토랑 주방에서 일할 때 송아지 고기와 닭가슴살로 코톨레타를 자주 만들어 고객에게 내주었다. 송아지 고기는 어떻게 먹어도 맛이 있긴 하다. 그렇지만 일본식 ‘돈가츠’처럼 종합적인 만족감을 주지는 못한다. ‘돈가츠’의 한판승이었다.
그렇게 일본에서 ‘돈가츠’와 맥주의 궁합에 취해있던 내가 또 다른 버전의 ‘돈가츠’를 발견했는데 그게 가츠산도였다. 돈가츠로 샌드위치를 만든 것이었다. 1930년 일본 도쿄에서 바쁜 직장인을 위해 고안됐다고 한다.
나는 흰 식빵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가츠산도는 모양부터 유혹적이었다. 싸가지고 어디 원족(소풍의 일본말)을 가고 싶게 만들었다. 그리고 식은 돈가스인데도 맛이 좋았다. 프랑스에 잠봉 뵈르, 이탈리아에 부로 에 아추게(burro e acciughe: 흰 빵에 큰 엔초비 살과 버터를 넣어서 먹는다. 의외로 맛있다) 같이 한 나라를 대표하는 샌드위치를 떠올리게 한다. 돈가스 덕분에 가츠산도는 샌드위치의 헤비급 타이틀을 차지했다.

내가 가츠산도를 좋아하는 까닭
그런데 한국에서는 이상하게 가츠산도를 내놓는 집이 많지 않았다. 이는 돈가스가 우리나라에서는 푸짐한 한끼로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름도 왕돈가스였다. 아직도 이 이름을 쓰는 돈가스 식당이 제법 있다. 왕돈가스 집에서는 돈가스는 물론이고, 밥에, 삶은 콩에, 계란후라이까지 줬다. 그래서 이런 집 돈가스 접시는 거의 양푼이처럼 컸다. 돈가스는 양푼 비빔밥과 출발이 비슷했던 셈이다. 이런 돈가스 문화에서 얄상한 가츠산도를 내놓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조건이 나쁜데도 내가 가츠산도를 찾아다닌 이유의 하나는 레드 와인 덕분이었다. 나는 구운 고기의 맛을 잘 즐기지 못한다. 그래서 한두점 먹는 게 전부다. 그런데 레드 와인은 기름기와 최적이다. 그러다보니 별 수 없이 구운 고기를 먹게 됐다. 그런 나에게 가츠산도는 구세주나 다름 없었다. 햄 치즈 샌드위치보다는 중후하고 구운 고기보다는 경쾌하고 맛있었다. 또 햄버거처럼 달거나 질척거리지 않은 점도 매력적이었다. 그래서 친구들과 맛있는 와인을 시음할 때 자주 가츠산도를 사서 마셨다. 이탈리아의 산지오베제 프랑스의 샤또네프 뒤 파프(chateauneuf de pape)와 조화가 좋았다.
내가 자주 가는 집이 서울교대 앞의 ‘산도’다. 산도는 서초동이라는 비싼 땅에서 가츠산도(에그산도도 있다)만 판다. 의외였다. 이 비싼 땅에 가츠산도가 잘 팔릴까라는 걱정을 했다. 하지만 늘 사람이 많았다. 나처럼 가츠산도를 좋아하는 사람이 제법 많다는 반증이어서 반가웠다.

가츠산도 핵심은 일본식 탕종 식빵
내가 이 집 가츠산도를 좋아하는 이유는 두툼한 120시간 숙성한 흑돈 돈가스도 돈가스지만 이 집 식빵 덕분이다. 이 집 빵은 일본식 식빵인 ‘쇼쿠판’이다. 일반 식빵과 질감과 식감이 완전히 다르다. 식빵의 질감이 촘촘해 쫀득하면서도 부드럽다. 그냥 입안에서 맥없이 무너지는 식빵이 아니다. 또 테두리가 갈색이 아니라 흰색이다. 게다가 테두리마자도 맛이 부드럽다. 뚜껑이 있는 빵틀에 넣어 낮은 온도로 구워서 빵테두리가 갈색이 아니라 흰색인 것이다.
일본은 세계 제빵의 역사에 여러 공헌을 했다. 독특한 빵인 단팥빵, 멜론빵, 소금빵을 만들기도 했지만 일본이 세계 제빵사에서 가장 뚜렷한 족적을 남긴 분야는 식빵이다. “일본은 주식이 쌀이 아니라 식빵”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식빵을 줄긴다. 식빵 시장의 규모만 연 1조5000억엔이다(우리 돈 14조원). 우리나라 전체 빵 시장 규모가 4조원 정도니까 식빵 시장이 얼마나 큰지 짐작할 수 있다.
일본은 식빵을 서양에서 배워 역시 자신의 방식만으로 발전시켰다. 특히 카이젠(개선이란 한자의 일본어 발음. 매일 조금씩 고쳐나가 품질가 생산성을 향상시킨다는 일본의 경영 문화를 듯한다)에 진심인 일본인들은 서양식 식빵을 환골탈태시켰다. 그게 쇼쿠판이다. 먼저 식빵을 굽는데 밀가루를 뜨거운 물에 반죽해 저온에서 숙성시키는 ‘탕종(湯種)법’으로 식빵에 극강의 부드러움을 줬다. 저온숙성과 저온 베이킹도 일본 식빵의 특징이다. 일본이 가츠산도라는 세계 역사에 없는 크로켓 샌드위치를 만들게 된 것은 이런 식빵의 질감 덕분일 것이다.
산도 직원에게 물어보니 산도 사장님이 일본에서 이 식빵을 배워와 매일 식빵을 직접 만든다고 했다. 뉴질랜드 버터를 쓰고 유화제나 팽창제를 쓰지 않는다고 했다. 실제 식빵을 1만4000원에 따로 판매하고 있었다. 식빵이 이렇게 맛이 있으니 식빵을 굽지 않고 생식빵으로 가츠산도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또 식빵과 생크림에 과일만을 넣어서 만드는 생크림 과일 산도도 판매하고 있었다. 웬만한 자신감이 아니면 할 수 없는 메뉴다.
가츠산도를 하는 집은 많지만 이 집처럼 빵을 직접 구워서 하는 집은 드물다. 암퇘지를 쓰고 좋은 등급의 돼지를 쓴다고 해도 가츠산도의 한 축은 식빵이다. 나처럼 고기보다 빵을 더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더욱 그렇다.
■산도 주소: 서울 서초구 서초대로56길 38 1층(교대역 1번 출구에서 300m)
■메뉴: 가츠산도(1만500원), 매운가츠산도(1만1000원), 에그산도(7500원), 생과일크림산도(8000원), 식빵(1만4000원)
*권은중 전문기자는 기자로 20여 년 일하다 50세에 이탈리아 북부 피에몬테의 ‘외국인을 위한 이탈리아 요리학교(ICIF)’에 유학을 다녀왔다. 귀국 후 , 경향신문, 연합뉴스, 조선일보 등에 음식과 와인 칼럼을 써왔고, 관련 강연을 해왔다. 『와인은 참치 마요』, 『파스타에서 이탈리아를 맛보다』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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