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록미디어 명정선 기자] 인공지능(AI)의 고도화가 소프트웨어 산업의 구조 자체를 바꾸고 있다는 경고가 나왔다. 최근 1년간 동종 펀드의 99%를 웃도는 성과를 낸 닉 에반스(Nick Evans) 폴라캐피털 글로벌테크펀드 매니저는 “애플리케이션 소프트웨어 기업 상당수는 장기적으로 생존하기 어려울 것”이라며 업계 전반에 대한 구조적 회의론을 제기했다.
그는 단순한 경기 둔화나 일시적 실적 부진이 아니라 “존재론적 위협”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AI가 단지 소프트웨어의 생산성을 높이는 도구가 아니라, 기존 소프트웨어의 기능을 직접 대체하는 단계로 진입하고 있다는 판단에서다.
“AI는 소프트웨어를 소비하는 동시에 만들어낸다”
에번스가 지적한 핵심은 AI 코딩 도구의 진화 속도다. 앤트로픽의 ‘클로드 코워크’와 같은 모델은 기존 소프트웨어를 분석하고 복제하며 수정하는 능력을 빠르게 고도화하고 있다. 이는 과거처럼 소프트웨어 기업이 기능을 개발해 고객에게 판매하는 일방향 구조를 약화시킨다.
기업 고객은 더 이상 완성형 애플리케이션을 외부에서 구매하지 않고, AI를 활용해 내부에서 필요한 도구를 직접 개발할 수 있다. 이 경우 기존 벤더의 가격 결정력은 급격히 낮아진다. 소프트웨어 산업의 진입장벽이 무너질 가능성이 커지는 셈이다.
에번스는 “AI는 소프트웨어를 소비하는 동시에 스스로 만들어낸다”며 “이전까지는 소프트웨어 기업이 공급자였지만, 이제는 고객이 잠재적 경쟁자가 된다”고 설명했다.
반복 매출 모델의 균열
전통적인 애플리케이션 소프트웨어 기업은 구독 기반 반복 매출 모델을 강점으로 내세워 왔다. 기업 업무 시스템이 한번 도입되면 교체 비용이 높아 장기간 고객을 유지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AI 도구가 빠르게 발전하면 상황은 달라진다. 특정 기능을 수행하는 모듈 단위 소프트웨어는 대체 가능성이 높아진다. 기능이 표준화될수록 차별화는 어려워지고 가격은 압박을 받는다.
에번스는 “소프트웨어는 본질적으로 코드의 집합이며, AI는 코드 생성 비용을 급격히 낮추고 있다”며 “장기적으로 수익성이 한계비용에 수렴할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코딩 개발과 AI 스타트업의 이중 압박
기존 소프트웨어 기업은 두 방향에서 동시에 압박을 받는다. 첫째는 고객사의 내부 개발 역량 강화다. 대기업은 자체 AI 모델을 도입해 특정 기능을 내재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외부 라이선스 비용을 줄이고 맞춤형 솔루션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이다.
둘째는 AI 네이티브 스타트업의 등장이다. 이들 기업은 기존 소프트웨어 구조를 전제로 하지 않고 처음부터 AI 중심으로 설계된다. 비용 구조와 개발 속도 면에서 전통 기업보다 유리할 수 있다.
에번스는 “과거에는 소프트웨어 기업이 기술 격차로 방어막을 형성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기술 변화 속도가 너무 빠르다”며 “기존 강자가 반드시 유리하다고 보기 어렵다”고 말했다.
살아남을 영역은 ‘기반 인프라’
그는 모든 소프트웨어를 동일하게 보지는 않는다. 애플리케이션이 아닌 인프라 소프트웨어는 상대적으로 방어력이 높다고 평가했다. 시스템의 기반을 제공하는 기업은 AI 활용이 늘어날수록 오히려 수요가 증가할 수 있다는 논리다.
예컨대 Cloudflare, Snowflake와 같이 데이터 처리, 네트워크, 클라우드 기반을 제공하는 기업은 AI 확산의 수혜를 받을 가능성이 있다. Nvidia를 비롯한 반도체 기업 역시 연산 수요 증가의 직접적 수혜주로 꼽힌다.
다만 이러한 영역을 제외하면 대규모 구조조정이 불가피할 수 있다는 게 그의 판단이다. 에번스는 “상당수 애플리케이션 소프트웨어 기업은 2000년대 인터넷 확산으로 급격히 위축된 신문 산업과 유사한 경로를 밟을 수 있다”고 전망했다.
“속도가 문제”…투자자 전략 재점검 필요
월가 일각에서는 과도한 우려라는 반론도 제기된다. 그러나 에번스는 AI 모델의 발전 속도를 가장 큰 변수로 꼽는다. 기술이 개선될수록 파괴적 효과는 기하급수적으로 확대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는 “문제는 기술이 아니라 속도”라며 “AI가 매년 비약적으로 개선되는 환경에서는 기존 비즈니스 모델의 지속 가능성을 보수적으로 평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AI는 소프트웨어 산업의 생산성을 높이는 동시에 그 수익 구조를 잠식하고 있다. 코드 작성 비용이 제로에 가까워지는 시대에, 과거와 같은 높은 마진과 독점적 지위를 유지할 수 있는 기업은 극소수에 그칠 수 있다는 경고다. 산업의 중심이 ‘완성형 애플리케이션’에서 ‘AI 기반 인프라’로 이동하는 전환기에, 소프트웨어 기업의 생존 조건은 근본적으로 재정의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