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 동남아 진출 교두보로 부상…무역 규모 확대
최원석 피니버스 CEO, "원화 스테이블코인 무역 결제 가능하다"
탈달러에는 교감, 디지털자산 둘러싼 기회와 기득권의 저항은 동일
[자카르타=James Jung 기자] 한국과 인도네시아는 1973년 정식으로 국교를 맺었다. 그 전까지 인도네시아는 사실 북한과 더 친밀했다.
1955년 인도네시아 반둥에서 비동맹 회의가 열렸다. 남북한은 2년전 끝난 6.25 전쟁의 상흔을 부여잡고 있을 때다. 동서 냉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세계는 미국과 소련 진영으로 갈려 싸우고 있었다.
이때 인도네시아는 다른 주장을 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 신생 독립국들이 반둥에 모여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야한다는데 뜻을 같이했다. 반둥회의 10주년을 기념하는 1965년 행사에는 김일성 북한 주석이 참석하기도 했다.
탈달러 노선
인도네시아가 주창한 비동맹 노선은 이후 브릭스(BRICS), 제3의 길로 이어지는 국제 정치의 큰 흐름 중 하나가 됐다. 이 같은 흐름은 경제적으로 ‘탈(脫)달러’ 이슈로 모아졌다.
트럼프 집권 2기를 맞아 전 세계는 달러 중심주의에서 벗어나기 위한 해법을 모색 중이다. 한국과 인도네시아도 무역 결제에 ‘탈달러’ 시스템을 도입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양국 중앙은행은 로컬통화 직거래(LCT) 체제를 도입키로 하고 협의를 이어가고 있다. 그러나 국가 간 결제망 혁신은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든다. 정치적으로 따질 것이 많다. 속도가 느릴 수 밖에 없다.
여기에 민간 핀테크 기업들의 공간이 생긴다. 블록체인 기술 기반의 원화 스테이블코인, 루피아 스테이블코인이 양국간 무역 결제 모델을 제시해 주목 받고 있다.
교역 확대, 복잡한 결제가 발목
우선 한국과 인도네시아의 교역 규모를 보자. 1973년 수교 당시 1억8500만달러에 불과했던 교역액은 현재 200억달러가 넘는다. 양국의 무역 거래 구조는 상호 보완적이다.
한국은 인도네시아로부터 유연탄, 천연가스, 동광 등 핵심 원자재와 신발, 의류 등의 소비재를 주로 수입한다. 반면 인도네시아로 수출하는 품목은 합성수지, 석유제품(휘발유·경유), 반도체, 자동차 등 고부가가치 공산품과 중간재가 주를 이룬다.
K컬쳐 영향으로 한국의 고급 소비재를 찾은 수요도 늘어나는 추세다. 인도네시아는 이슬람 국가이지만, 소비 문화에 있어서는 종교적인 엄격함이 상대적으로 덜하다. K팝 가수에 열광하고, K뷰티, 미용용품에 대한 선호도도 높다.
문제는 이러한 활발한 교역 이면에 중소기업들이 겪는 결제의 고충이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이다. 대기업과 달리 자금력이 부족한 중소기업들은 기존 스위프트(SWIFT)망을 이용한 달러 결제 시스템에서 비용을 부담해야 했다. 무역 대금을 치르기 위해 원화를 달러로, 다시 달러를 루피아로 바꾸는 이중 환전 과정에서 2~3%에 달하는 수수료가 증발하기 때문이다.
송금부터 수취까지 며칠씩 소요되는 정산 지연은 기업의 현금 흐름을 막는 주원인이다. 인도네시아 기업들이 한국산 소비재를 수입할 때도 마찬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인도네시아 의원들, 디지털자산에 높은 관심
인도네시아 정치권은 달러 결제 모델이 갖는 문제에 상당한 공감을 표시했다. 지난 1월14일 인도네시아 의회를 방문하는 민병덕 의원을 동행 취재했다. 우리나라 기업, 학계, 업계 관계자들도 함께했다.
인도네시아 하원 재정위원회(제11위원회) 모하마드 하칼(Mohamad Hakal) 부위원장이 민 의원을 맞았다. 재정위원 전원이 간담회에 참석하는 등 현장은 이례적인 열기로 가득찼다.

민 의원은 “인도네시아가 지향하는 국가 발전 전략, ‘골든 인도네시아'(Golden Indonesia) 비전과 디지털자산 발전을 위한 정책 전략에 공감한다”며 “미래 세대를 위한 장기적 가치 창출을 핵심 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점에 의견을 같이 한다”고 말했다.
민 의원은 “인도네시아의 풍부한 천연자원과 이를 기반으로 디지털자산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며 “디지털자산을 단순한 투기적 자산이 아니라 금융산업과 실물경제를 연결하는 새로운 제도적 실험이자 금융 인프라”라고 말했다.
하칼 부위원장은 “한국 의회가 마련 중인 디지털자산 입법을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다”며 “인도네시아도 디지털자산 분야에 투자 확대와 제도 정비를 서두르고 있다”고 말했다. 하칼 부위원장은 “의회에서 재정위 회의를 할 때에도 의원들 전원이 참석하는 일이 드물다. 오늘 간담회에는 전원이 모였다”고 말해 웃음이 터지기도 했다.
하칼 부위원장은 “그만큼 의원들이 디지털자산 산업에 관심이 높다는 뜻”이라며 “한국과 협력을 모색하고 싶다”고 말했다.
“달러 말고, 우리끼리 우리 돈으로 거래합시다”
간담회에 참석한 국내 업계 관계자들은 양국 무역에서 발생하는 실질적인 애로 사항을 전달했다. 최원석 피니버스 대표는 “무역 현장에서는 달러 유동성 부족으로 결제 대금이 지연되는 일이 빈번하다”며 “기존 금융권은 보수적이라 이러한 현장의 문제를 빠르게 해결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양국 중소기업들은 그 대안으로 무역용 스테이블코인 도입을 희망하고 있다. 최 대표는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최 대표는 “한·인니 무역 거래에서 달러를 배제하고 원화·루비아 스테이블코인으로 직접 거래하자”고 제안했다.
간담회 회의장에 있던 인도네시아 여야 의원들은 “굿 아이디어”라며 박수를 쳤다. 현장에서 이를 지켜본 기자는 ‘환호의 박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중에 알게 됐다.
이러한 반응은 인도네시아가 겪고 있는 고질적인 외환 문제와 맞닿아 있다. 미국의 금리 정책과 달러 가치 변동에 휘둘리는 경제 구조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인도네시아 의원들은 한국 기업인의 제안에서 어떤 가능성을 발견한 것이다.

피니버스의 실험
최 대표는 양국 무역결제에 스테이블코인을 활용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안을 찾고 있다. 이 프로젝트를 주도하고 있는 피니버스는 원화 스테이블코인 ‘KORT(코트)’을 통해 기존 결제망의 비효율성을 타파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피니버스의 모델은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해 환전 단계를 획기적으로 줄이는 것이다. 인도네시아 수입업체가 현지 거래소에서 루피아로 KORT를 매수한 뒤, 이를 한국 수출업체의 지갑으로 전송하면 거래가 완료된다.
피니버스는 인도네시아 디지털자산 거래소인 ‘노비(NOBI)’와 업무협약(MOU)을 체결하고 KORT 상장을 추진 중이다. 이미 여성 건강 브랜드 ‘질경이’의 무역 결제에 이 시스템을 시범 적용하며 실증 테스트를 이어가고 있다.
최원석 대표는 무역 사업 경험을 바탕으로 이 프로젝트를 구상했다. 그는 “일본, 중국, 동남아 등과 거래하며 환율 변동과 송금 지연 문제를 뼈저리게 느꼈다”며 “혁신 기업이 현장의 문제를 빠르게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최 대표는 원화 스테이블코인 발행을 은행에만 국한하려는 움직임에 대해 아쉬움을 나타냈다. 소규모 무역업체, 중소기업들이 유연하게 활용할 수 있는 원화 스테이블코인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그는 “전 세계적으로 스테이블코인 시장이 빠르게 움직이는 상황에서 안전성만을 이유로 기회조차 주지 않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며 “실질적인 운영 능력과 기술적 역량을 갖춘 기업에 기회를 부여해야 국가 금융 경쟁력에도 도움이 된다”고 역설했다.
피니버스는 인도네시아를 시작으로 베트남, 태국, 몽골 등 달러 확보가 어려운 국가들로 사업을 확장할 계획이다. 국내 법제화가 완료되는 대로 KORT를 국내 거래소에도 상장하기를 원한다. 국가 간 환전 통로를 확보해야 무역 거래에 쓸 수 있기 때문이다.
규제의 벽과 기회
스테이블코인 무역 결제에는 현실적인 어려움이 존재한다. 피니버스가 넘어야 할 규제의 벽은 의외로 높다. 이 벽은 한국과 인도네시아 양쪽에 다 있다.
인도네시아 중앙은행은 암호화폐를 일상적인 소매 ‘결제(payment)’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을 엄격히 금지한다. 대신 중앙은행 발행 디지털 화폐(CBDC)인 ‘디지털 루피아’ 프로젝트를 통해 결제 주도권을 쥐려 하고 있다.
무역 대금의 국가 간 ‘정산(settlement)’은 다른 영역이다. 인도네시아 블록체인협회 소속 거래소 임원들은 “국내 결제는 불가능하지만, 국가 간 정산 수단으로서의 스테이블코인 활용은 가능하다”는 입장을 나타냈다. 단, 중앙은행과 금융당국의 정책적 결단이 필요하다.
디지털자산 규제 권한을 가지고 있는 인도네시아 금융감독청(OJK)의 입장은 어떨까. 의회 방문 후 OJK를 취재했다. 하산 파우지(Hasan Fawzi) OJK 수석 위원은 “달러 스테이블코인이 시장을 독점하면 국부 유출이 우려된다”는 원론적인 메시지를 보냈다.
박수의 의미
인도네시아가 무역용 스테이블코인을 허용할까? OJK는 규제 샌드박스를 통해 루피아 스테이블코인을 실험 중이다. 모두 3종류가 테스트를 받고 있다.
여기까지만 보면 무역용 스테이블코인 도입이 의미 있는 진전을 이룬 것처럼 비춰진다. 실상은 그렇지 않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민간 스테이블코인과 CBDC 분리 전략을 선호한다. 민간 스테이블코인이 CBDC와 경쟁하는 상황을 원치 않는 것으로 보인다.
파우지 위원은 “CBDC와 스테이블코인이 쓰임에 따라 자신의 영역을 구축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구체적으로 그것이 어떤 영역인지 언급하지 않았다.
OJK는 결제 영역에서 스테이블코인은 중앙은행 소관이라는 점을 수 차례 강조했다. OJK가 먼저 “무역 결제에 스테이블코인을 도입하자”고 주장할 것 같지는 않았다.
우리나라에서도 한국은행과 금융위원회는 은행 주도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선호한다. 한은이 참여하는 합의체에서 코인 발행을 만장일치로 결정해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국회에서 논의 중인 디지털자산 2차 입법에서 한은의 이 같은 주장이 관철될 것인지는 미지수다.
인도네시아 국회의원들은 무역용 스테이블코인에 대해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박수의 의미는 무엇일까? 새로운 기회를 만들고자 하는 의회의 움직임에 정당성을 부여 받고 싶었던 것일까? 중앙은행, 금융당국 등 기득권 관료들의 반대에 직면해 있는 상황에서 한국 기업가의 말에 강한 동지애를 느낀 것일까?
인도네시아 현지 취재를 마무리하면서 디지털자산기본법을 놓고 여의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떠올랐다. 디지털자산 시장이 펼칠 기회와 기득권의 저항은 두 나라에서 거의 같은 양상을 띠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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