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헤스케스, 남호주 햇빛이 빚은
순수한 페트롤리움 향 리슬링
라임·꽃향도…표현력 뛰어나
[블록미디어 권은중 기자] 석유는 전 세계 원자재 가운데 가장 많이 거래되는 ‘검은 금’이다. 근대 문명이 석탄 위에 세워졌다면 현대 문명은 석유 위에 세워졌다. 내연기관과 그 내연기관으로 돌리는 발전기는 20세기적 현실을 만들었다. 하지만 석유는 밝은 면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석유가 연소되면서 유해 물질이 나오고 이 오염물은 지구와 인간을 위협하고 있다. 석유는 문명의 향기이기도 하지만 피하고 싶은 ‘검은 오염’을 상징한다.
그런데 와인에서는 다르다. 와인에서 석유향은 상상력의 원천이다. 석유향을 뿜어내는 대표적인 포도 품종은 리슬링(Riesling)이다. 리슬링은 점판암(Slate)에서 잘 자란다. 점판암이란 진흙이 지구 내부에서 중력의 압력을 받아 굳어져 생긴 변성암이다. 이 변성암은 얇고 판형 모양으로 깨진다. 이런 점판암이 깔린 토양은 햇빛을 잘 가둔다. 하지만 밤에는 금세 식어서 차가워진다. 점판암 토양은 열탕과 냉탕을 반복하는 곳이다.
리슬링 석유향은 태양과 대지의 마법
리슬링은 이런 곳에서 자기를 방어하기 위해 독특한 화학물질을 품는다. 카로티노이드(carotenoid)이다. 이름은 어렵지만 우리에게 매우 친숙한 물질이다. 당근의 베타카로틴이 이 카로티노이드가 변환한 것이다. 토마토의 라이코펜 역시 카로티노이드의 일종이다. 독특한 풍미와 맛을 낸다. 그리고 건강에 좋다. 이 카로티노이드가 변환하면서 석유향을 내게 된다.
리슬링의 독특한 석유향은 태양과 대지의 가르침을 포도가 해석해 풀어내는 아름다운 거미줄이다. 아버지의 의지와 어머니의 자애가 한 아이의 세계를 키우 듯이 말이다. 이것이 양조가들이 말하는 떼루아다.
리슬링은 석유향만 품고 있지 않다. 시트러스나 레몬향도 강하다. 거기에 적당한 당도도 있다. 당도와 산도 그리고 이런 드라이한 석유향까지 가지고 있어서 리슬링은 향신료를 많이 쓴 음식과 잘 맞는다. 한식의 고춧가루나 고추장도 적당히 씻어내준다. 리슬링은 머리 속에서는 상상력을, 입 안에서는 청량감을 선사하는 팔방미인이다. 그래서 나는 리슬링을 좋아한다.
하지만 모든 리슬링이 이런 석유향을 내지 않는다. 석유향은 리슬링이 햇빛을 많이 받고 자랐다는 의미다. 그래서 좋은 리슬링의 조건 가운데 하나가 이런 석유향이다. 독일 리슬링보다는 호주 리슬링이 이런 석유향이 많이 난다. 남호주의 햇빛을 받고 자라기 때문이다. 그리고 호주 리슬링은 가격도 조금 더 저렴한 편이다.
헤스케스(Hesketh) 클레어밸리 리슬링은 이런 석유향이 일품이다. 이 와인은 남호주 클레어 밸리의 워터베일(Watervale)에서 생산되는데 이 지역은 일교차가 커서 리슬링이 생장하기 조건이 좋다. 작년에 중식당에서 열린 모임에서 지인이 가져왔는데 그때 마셔보고 청량함에 반했던 와인이었다. 깔끔한 석유향 뒤에 밝은 감귤향과 작은 흰꽃의 향이 밀려왔다. 작은 조약돌을 떠올릴 수 있는 미네랄감도 느껴졌다. 가격에 견주면 발군의 퍼포먼스였다. 주홍빛 라벨도 깔끔했다. 호주의 밝고 환한 햇빛을 담고 있었다.

헤스케스 리슬링, 주홍빛 라벨 디자인 인상적
헤스케스는 2006년 남호주 애들라이드에서 존 헤스케스 부부가 설립한 신생 와이너리다. 그래서일까? 헤스케스의 라벨 디자인은 극단적으로 심플하다. 클레어밸리 리슬링도 단색을 썼듯이 다른 품종의 와인들도 대부분 단색 라벨을 쓴다.
그런데 집 근처 와인 숍에서 헤스케스 클레어밸리 리슬링을 파는 게 아닌가. 그래서 구매해서 바로 내가 즐기는 당근과 렌틸콩을 곁들인 열기버터구이를 만들어 마셨다. 당근은 카로티노이드의 중합체인 베타카루틴이 풍부하다. 그래서 생선의 바다향을 잘 잡아준다. 익으면 여러가지 향이 둥글둥글해지고 버터나 기름에 용해돼 부드러운 질감까지 선사한다. 그래서 나는 생선요리에 당근을 많이 쓴다. 당근 요리는 카로티노이드가 풍부한 리슬링과도 잘 어울린다.
열기는 강원도 속초에 여행을 갔을 때, 속초중앙시장에서 사온 것이다. 속초중앙시장에서는 가자미, 열기, 이면수 반건조 생선을 판다. 여러 생선을 사서 먹어봤는데 살이 두툼한 열기가 내 입에 가장 맞았다. 특히 열기는 핑크빛인데 구워놓으면 빠알간 색깔이 식감을 자극해주었다.
역시 버터를 넣고 당근과 함께 구운 열기는 리슬링과 절묘하게 어울렸다. 버터의 지방에 우러나온 당근 향 배인 열기 살의 달콤함이 리슬링과 좋은 페어링을 보여준다. 흰살 생선의 적당한 기름기와 당근향이 리슬링의 석유향과 시트러스 향과 밀고 당김을 반복하다가 목으로 부드럽게 넘어간다. 그리고 작은 방울같은 화한 여운이 밀려온다. 근사한 표현력을 가진 와인이었다.
헤스케스 리슬링의 표현력 너머에는 깊고 깊은 지구 속에서 만들어진 점판암과 멀고 먼 우주를 달려온 햇빛이 숨겨져 있다. 인간의 좁은 눈으로는 헤아리기 어려운 억겁의 세월과 수백만km의 거리가 이 가늘고 예쁜 와인병에 담겨 있는 것이다. 이 와인의 석유향은 그래서 더 그윽하다.
*권은중 음식전문기자는 기자로 20여 년 일하다 50세에 이탈리아 북부 피에몬테의 ‘외국인을 위한 이탈리아 요리학교(ICIF)’에 유학을 다녀왔다. 귀국 후 , 경향신문, 연합뉴스, 조선일보 등에 음식과 와인 칼럼을 써왔고, 관련 강연을 해왔다. 『와인은 참치 마요』, 『파스타에서 이탈리아를 맛보다』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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