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록미디어 명정선 기자] 전 세계 자금 36조달러가 묶여 있는 미국 자산 시장에 미묘한 균열이 감지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 재집권 이후 제기됐던 ‘셀 아메리카’ 우려는 현실화되지 않았지만, 달러 약세와 미 국채 매입 둔화가 동시에 나타나며 글로벌 투자자들은 미국을 떠나기보다 ‘헤지’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고 있다는 분석이다. 12일(현지시각) 월스트리트저널(WSJ)은 글로벌 큰 손들이 미국을 전면 매도하는 대신 통화 노출을 줄이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에 따라 세계 금융질서의 중심축에도 서서히 변화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는 분석이다.
달러 8% 하락…강한 증시에도 꺾인 통화
가장 눈에 띄는 신호는 달러 약세다. 달러 가치는 지난 1년간 약 8% 하락하며 수년래 저점 수준으로 밀렸다. 이는 강한 미국 증시, 견조한 경기, 주요 선진국 대비 높은 금리라는 통상적인 달러 강세 요인과 배치되는 흐름이다. WSJ는 이를 두고 “투자자들이 여전히 미국 자산을 보유하길 원하지만, 통화 리스크에 대해서는 점점 더 불편함을 느끼고 있다는 방증”이라고 짚었다.
존 시다위 페더레이티드 헤르메스 시니어 포트폴리오 매니저는 “이건 ‘셀 아메리카’가 아니라 ‘헤지 아메리카’”라며 “달러를 직접 파는 방식으로 미국 노출을 줄이는 것이 주식이나 채권을 매도하는 것보다 더 쉽고 저렴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그는 이러한 환헤지 수요가 다시 달러 매도로 이어지며 약세를 심화시키는 자기강화적 순환을 만들 수 있다고 덧붙였다.
실제 유럽 기관투자가들은 행동에 나섰다. 덴마크 중앙은행에 따르면 자국 연기금과 보험사의 달러 자산 환헤지 비율은 지난해 초 61%에서 연말 71%로 상승했다. WSJ는 “일본과 대만 대형 생명보험사들이 아직은 상대적으로 낮은 헤지 비율을 유지하고 있어, 이들의 전략 변화가 발생할 경우 달러에는 상당한 부담이 될 수 있다”고 내다봤다.
미 국채 시장에서도 미묘한 균열이 감지된다. 외국인의 미 국채 보유액은 지난해 11월 기준 9조4000억달러로 사상 최대를 기록했지만, 11월까지 1년간 순매입 규모는 4220억달러로 전년 동기 6410억달러에서 둔화됐다. 일부 북유럽 중앙은행과 기관은 순매도 전환하기도 했다.
덴마크 교사 연금 등을 운용하는 아카데미커펜션은 올해 1월 1억달러 규모의 미 국채를 매각하며 시장의 주목을 받았다. 안데르스 셸데 아카데미커펜션 CIO는 WSJ에 “우리는 놀랐다. 그렇게 큰 결정도 아니었고 일상적인 운용의 일환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의 재정적자와 부채 증가에 대한 우려가 배경이었다고 설명했다.
일본·중국이 쥔 변수…보이지 않는 국채 흐름
그러나 더 큰 질문은 일본과 중국이다. 일본 금리 상승은 해외에 투자된 자금을 본국으로 되돌리는 유인을 높일 수 있다. 중국의 공식 미 국채 보유액은 2008년 이후 최저 수준으로 줄었지만, 브래드 세처 미국외교협회 선임연구원은 벨기에 등 역외 중개기관을 통한 간접 보유까지 포함하면 실질 보유액은 1조달러를 웃돌 수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중국 국책은행이 위안화 강세를 억제하기 위해 달러를 매입하는 과정에서 미 국채를 사들이고 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그럼에도 미국 증시는 여전히 ‘예외’로 남아 있다. 미 재무부에 따르면 지난해 11월까지 1년간 외국인은 미국 주식을 6890억달러 순매수했다. 이는 전년 같은 기간 1970억달러에서 급증한 수치다. 빈센트 모르티에 아문디 CIO는 “지난해 고객들은 ‘이사회에 가서 미국 주식 비중을 줄이겠다고 말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려면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다”고 전했다.
최근 들어 닛케이225와 스톡스유럽600 지수가 S&P500을 앞지르면서 글로벌 자산배분 재조정 논의가 고개를 들고 있지만, 실제 비중 축소는 쉽지 않다. 많은 연기금과 기관투자가들이 미국 비중이 높은 글로벌 벤치마크를 따르고 있어 전략 수정에는 이사회 승인 등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니콜라이 탕엔 노르웨이 국부펀드 CEO는 1월 미국 기술주 비중에 대한 질문에 “AI 기업을 그냥 팔 수는 없다. 그런 위험 예산은 없다”고 말했다.
WSJ는 “지정학적 균열이 서서히, 빙하처럼 움직이고 있다”고 평가했다. ‘셀 아메리카’는 아직 현실이 되지 않았다. 다만 세계 자금은 미국을 떠나기보다 위험을 덜어내는 쪽으로, 조용하지만 분명하게 ‘헤지 아메리카’로 방향을 틀고 있다는 진단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