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록미디어 김해원 기자] 8년 넘게 막혀 있던 국내 디지털자산공개(ICO) 제도가 조건부 허용 국면에 접어들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그러나 발행 요건과 규제 체계가 아직 불분명한 만큼, 해외에서 토큰을 발행해온 국내 기업들이 당장 제도권으로 돌아올 가능성은 제한적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31일 금융당국과 정치권에 따르면 현재 논의 중인 디지털자산기본법(2단계 입법)에는 ICO를 전면 허용하는 대신 △백서 제출 △공시 의무 △발행 주체 제한 등 요건을 충족한 경우에 한해 국내 ICO를 조건부로 허용하는 방안이 포함될 가능성이 거론되고 있다. 이르면 2026년 상반기부터 일정 기준을 충족한 국내 법인에 한해 제도권 내에서 직접 코인 발행이 가능해질 수 있다는 관측이다.
‘금지의 역설’…해외 우회 발행만 키웠다
국내 ICO는 2017년 9월 금융위원회의 ‘모든 형태의 ICO 전면 금지’ 방침 이후 사실상 불법 영역으로 분류됐다. 이후 국내 기업들은 해외에 페이퍼컴퍼니나 재단을 설립해 토큰을 발행하는 우회 방식을 선택해 왔다.
김갑래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지난 보고서에서 “국내 ICO 전면 금지는 무분별한 발행을 막는 효과는 있었지만, 발행 시장 자체를 해외로 밀어내는 결과를 낳았다”고 지적했다. 그는 “국내 규제는 발행만 막았을 뿐, 국내 유통과 투자를 차단하지는 못했다”며 “그 결과 국내 투자자들은 국문 백서나 공시 의무가 없는 해외 발행 토큰에 노출됐고, 정보 비대칭과 책임 공백 문제가 반복됐다”고 설명했다.
이번 조건부 ICO 허용 논의의 핵심은 발행 주체 제한이다. 개인이나 소규모 프로젝트의 무분별한 토큰 발행을 차단하고, 책임 소재를 명확히 하기 위해 일정 규모 이상의 법인만 발행을 허용하는 구조가 유력하다.
강동현 코빗리서치센터 연구위원은 “국내에서 ICO가 허용될 경우 발행 주체와 책임 구조가 분명해진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변화로 볼 수 있다”며 “그간 해외 발행 과정에서 발생했던 공시 공백이나 사후 관리 부실 문제가 완화되면서 전반적인 투명성이 강화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정책 변화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네이버와 카카오의 현재 스탠스는 신중 모드에 가깝다. 네이버는 현재 ICO와 직접 연관된 사업을 검토하고 있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네이버페이 역시 자체 토큰 발행보다는 두나무와의 협업을 통한 스테이블코인 등 결제 인프라 중심 사업에 무게를 두고 있으며, 관련 법안과 당국 논의를 지켜보는 단계라는 설명이다.
카카오 역시 과거 클레이튼을 통해 블록체인 생태계를 구축했지만, 국내 ICO 허용 논의와 관련해선 적극적인 행보를 보이지 않고 있다. 업계에서는 이미 해외 재단 구조를 통해 토큰 발행과 운영 체계를 안정적으로 구축한 상황에서, 규제가 완전히 정착되지 않은 국내 시장으로 즉시 복귀할 유인은 크지 않다는 평가가 나온다.
한 핀테크 업계 관계자는 “법적 가이드라인이 명확히 정립되지 않은 상황에서 주주와 고객의 자산을 보호해야 하는 책임이 있는 만큼, 규제적 모호성이 해소되지 않은 자금 조달 방식에는 신중할 수밖에 없다”며 “현재 업계는 특정 방식을 서둘러 도입하기보다는 각국 금융당국의 정책 변화를 면밀히 모니터링하는 단계”라고 말했다.
세제 혜택 없는 ICO⋯ ‘리쇼어링’ 가능할까
ICO 제도화의 기대 효과로는 리쇼어링(Reshoring·사업을 위해 해외로 나간 자국 기업이 다시 본국으로 복귀하는 현상)과 스타트업·중소기업의 새로운 자금 조달 창구 확대가 꼽힌다. 다만 그 효과는 제한적일 가능성이 크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미 글로벌 이용자 기반을 확보한 게임·콘텐츠·플랫폼 기업일수록 제도권 복귀를 검토할 여지는 있지만, 세제 혜택이나 규제 경쟁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한 해외에서 구축한 사업 구조를 대거 국내로 옮길 유인은 크지 않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아부다비 글로벌마켓(ADGM)이나 홍콩은 디지털자산 발행·운영 기업에 대해 법인세 감면, 명확한 토큰 분류 체계, 금융당국의 사전 가이드라인 제공 등 제도적 인센티브를 앞세워 블록체인 기업 유치에 적극 나서고 있다. 국내 제도 역시 투자자 보호를 전제로 하면서도 국제 경쟁력을 고려한 설계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증권업계 관계자는 “ICO 요건이 엄격해질수록 전면적인 회귀보다는 점진적인 변화가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며 “발행이 허용되면 발행 주체 요건과 공시·사후 관리 기준이 강화될 수밖에 없어, 거래소·커스터디·법률·회계·보안 등 컴플라이언스 인프라 전반에서 수혜가 나타날 것”이라고 말했다.
과거처럼 단순 토큰 발행만으로는 제도권 진입이 어려워지고, 백서 검증과 자금 흐름 관리, 보관·감사·보안 체계까지 갖춘 구조가 요구될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서, 직접 발행에 나서는 기업보다 이를 지원하는 인프라 사업자들의 역할과 시장 비중이 먼저 커질 수 있다는 설명이다.
ICO 제도화의 현실적 효과…복귀보다 진입
업계에서는 이번 ICO 허용 논의를 대기업 복귀 신호라기보다, 국내 블록체인 산업 전반에 대한 상징적 규제 완화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한 블록체인 게임 기업 관계자는 “완전한 제도화라고 보긴 어렵지만, 그동안 막혀 있던 규제 빗장이 일부 열리는 셈”이라며 “스타트업이나 중소기업 입장에서는 굳이 해외 법인을 설립하지 않고도 국내에서 블록체인 사업을 시작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강 연구위원 역시 “현재는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토큰 발행 규제가 점차 정비되고 있어, 한국도 제도 논의를 더 이상 미루기 어려운 국면에 와 있다”면서도 “해외로 나간 국내 기업들이 실제로 돌아오기 위해서는 ICO 허용만으로는 부족하고, 세제나 회계 처리 등 후속 규제 정비가 병행돼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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