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고용·금융시장… 정치가 흔들어도 자본은 움직이지 않았다
베네수엘라에서 월가까지, ‘투자 불가’라는 판단
[블록미디어 명정선 기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이번 주 베네수엘라 사태를 두고 다시 한 번 정치적 결단이 시장을 움직일 수 있다는 확신을 드러냈다. 마약 밀매 단속이라는 기존 명분은 빠르게 뒤로 밀렸고, 대신 세계 최대 수준의 원유 매장량이 전면에 등장했다. 트럼프는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을 겨냥한 전격적 압박 조치를 단행하며, 미국 석유 메이저들이 곧 베네수엘라 유전으로 몰려들 것이라는 메시지를 반복했다. 그러나 백악관의 기대와 달리 월가는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그 배경을 블룸버그가 분석했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트럼프는 9일(현지시각) 백악관에 20명에 가까운 에너지 업계 관계자들을 불러 모아 베네수엘라 석유 생산 재개를 논의하며 “오늘이나 아주 가까운 시일 내에 합의가 이뤄질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회의에 참석한 기업 최고경영자들의 반응은 신중을 넘어 냉담에 가까웠다. 수십 년간 방치된 설비와 정치적 불확실성, 국제 제재의 후폭풍을 감안하면 생산 정상화에 필요한 1000억달러 수준의 투자는 현실성이 낮다는 판단이 지배적이었다. 엑손모빌의 대런 우즈 최고경영자(CEO)는 베네수엘라를 두고 “현재로서는 투자할 수 없는 국가”라고 표현했다. 트럼프의 정치적 압박에도 자본의 계산기는 바뀌지 않았다.
이 같은 판단은 베네수엘라에 국한되지 않는다. 미국 내부를 바라보는 시장의 시선도 점점 차가워지고 있다. 12월 미국 비농업 고용은 5만 명 증가하는 데 그치며 시장 예상치를 크게 밑돌았다. 앞선 두 달의 고용 증가 폭 역시 하향 조정됐다. 실업률은 4.4%로 소폭 낮아졌지만, 장기 정부 셧다운 이후의 기술적 조정이라는 해석이 우세하다. 결과적으로 2025년은 코로나19 충격이 본격화됐던 해 이후 미국 노동자들에게 가장 힘든 한 해로 기록됐다.
뉴욕 연방준비은행이 발표한 월간 설문조사에서도 균열은 분명하다. 12월 인플레이션 기대치는 오히려 상승한 반면, 일자리를 구하기 쉽다는 응답은 최소 12년 반 만에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 노동시장이 연말까지도 취약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음을 시사한다. 미시간대의 베치 스티븐슨 교수는 “이번 고용보고서는 다른 지표들이 보여준 흐름과 동일하다”며 “노동시장이 분명히 약화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경제학자들은 올해 역시 고용 기회는 제한되고 임금 상승세는 둔화될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그럼에도 월가는 호황을 누리고 있다. 트럼프 집권 첫해를 지나며 2025년의 승자를 꼽으라면, 시장에서는 주저 없이 월가를 지목한다. JP모건, 뱅크오브아메리카, 씨티그룹, 웰스파고, 골드만삭스, 모건스탠리 등 미국 6대 은행은 다음 주 실적 발표에서 총 1570억달러에 달하는 연간 순이익을 기록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역대 두 번째로 높은 수준이다. 규제 완화 기조 속에 기업 인수합병이 급증했고, 트럼프의 돌발적인 정책 발언에 대응하기 위한 트레이딩 수요가 수익을 떠받쳤다. 인공지능 도입을 통한 비용 절감 효과도 은행 실적 개선에 힘을 보탰다.
정치적 불안은 금융시장뿐 아니라 사회 전반으로 번지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의 강경 이민 단속을 둘러싼 논란은 연일 이어지고 있다. 미네소타에서 이민 단속 요원에 의해 37세 여성이 사망한 사건 이후에도 항의 시위는 계속됐고, 포틀랜드에서는 이민세관단속국 요원들이 추가로 두 명을 총격해 병원으로 이송됐다. 정부는 차량이 ‘무기화’됐다고 주장했지만, 이를 입증할 증거는 제시되지 않았다. 포틀랜드의 키스 윌슨 시장은 “우리 도시는 군사화된 요원들의 훈련장이 아니다”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트럼프의 개입은 주택 금융시장에서도 새로운 논쟁을 불러왔다. 대통령이 패니메이와 프레디맥에 2000억달러 규모의 모기지 채권 매입을 지시하면서, 백악관은 연방준비제도의 전통적 역할 영역에 한 발 더 깊숙이 들어왔다. 시장에서는 미국 대통령이 이처럼 직접적으로 자산 매입을 통해 금리를 조정하려 한 전례를 찾기 어렵다는 평가가 나온다. 베어드의 전략가 키릴 크릴로프는 “이는 시장 기반 금융과 정치적 조작 사이의 경계를 흐린다”며 “정치적 리스크를 다시 주택 금융시장으로 끌어들이는 결정”이라고 지적했다.
지정학적 지형도 빠르게 재편되고 있다. 터키는 사우디아라비아와 파키스탄이 주도하는 새로운 방위 동맹에 합류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전해진다. 이 동맹은 어느 한 국가에 대한 공격을 전체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하는 조항을 담고 있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집단방위 조항을 연상시킨다. NATO에서 두 번째로 큰 군사력을 보유한 터키가 이 구상에 관심을 보이는 배경에는 미국의 안보 공약에 대한 신뢰 약화가 깔려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베네수엘라에서 시작된 ‘투자 불가’라는 판단은 이제 더 넓은 영역으로 확장되고 있다. 트럼프의 정치는 빠르고 공격적이지만, 자본은 여전히 계산을 멈추지 않는다. 정치가 시장을 흔들 수는 있어도, 돈이 움직일지를 결정하는 것은 여전히 위험과 수익의 냉정한 저울이라는 점만은 변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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